주작산과 덕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한 폭의 그림같은 풍광

덕룡산아래 수양, 월하마을 자리틀어 빼어난 풍광탓에 귀농·귀촌인 증가
덕룡산 중턱 규사채취로 훼손 아쉬워, 수양, 월하 주민들 분진피해 호소

주작산과 덕룡산이 만나는 곳에는 신전면 수양마을과 도암면 월하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마을은 모두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귀농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신전면 수양마을에서 바라본 덕룡산이 들판의 푸른 보리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영수마을과 어관마을을 지난 군계는 본격적으로 주작산 서쪽능선을 따라간다. 군계가 지나가는 주작산 능선을 따라가면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주작산휴양림을 만날 수 있다. 주작산휴양림은 주작산자락과 덕룡산 자락이 이어지는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이 곳에 오르면 두 산의 멋진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주작산휴양림에서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도 날씨가 좋은 날에는 강진만 바다까지 한눈에 훤히 내려다볼 수 있어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의 방문도 이어진다.

빼어난 풍경 자랑하는 수양마을
군계가 따라가는 주작산과 덕룡산이 만나는 곳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고 이 곳 부근에는 봉양, 삼인, 수양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수양마을은 주작산휴양림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수양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수려한 자연경관이다. 마을바로 뒷산으로 덕룡산이 동북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석문산과 만덕산과 만난다. 마치 덕룡산이 아버지처럼 수양마을을 따뜻하게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수양마을의 빼어난 자연환경은 주민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정도이다.

현재 수양마을은 9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1999년 조사된 인구자료에 따르면 수양마을에는 78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현재는 97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니 19가구 정도로 늘어난 셈이다. 일반적으로 지역내 대부분의 마을들은 가구수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 곳 수양마을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구수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귀농·귀촌 가구들이 수양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수양마을 주민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도시민들이 수양마을로 귀농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도 그럴것이 수양마을내에서 덕룡산 방면으로 조금만 고지대로 올라가도 강진만이 보인다.

바로 뒤에는 아름다운 덕룡산과 주작산, 만덕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니 그 누구라도 경치에 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마을주민들도 낯선 사람들에 대해 경계를 하거나 텃세를 부리는 경우가 없어 귀농인들이 이 곳 수양마을로 자리 잡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재밌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60~70년대로 나무로 장작을 패서 부뚜막에서 난방과 밥을 해먹던 시절에 수양마을 인근의 산이 매물로 나왔다. 2만평이 넘는 이 산을 혼자서는 구입할 능력이 없어 아는 지인 1명과 함께 나눠서 산을 구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산을 구입하려던 2명이 모두 보다 위쪽에 있는 산을 구입하려고 해서 무산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 사람들이 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덕룡산 자락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산의 고지대를 제외하곤 모두 민둥산이었다. 산을 구입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저지대에는 쓸만한 나무가 없으니 나무가 남아있는 고지대의 산을 구입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80년대 이후에 녹지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주작산과 덕룡산은 푸르름을 다시 되찾았다고 한다.

물 부족 문제… 봉양제로 해결
수양마을에서 주작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커다란 저수지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바로 봉양제이다. 20여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이 저수지가 생겨나면서 수양마을 사람들의 농업용수 문제가 해결됐다. 봉양제 축조 이전에만 하더라도 수양마을은 농사지을 물이 턱없이 모자랐다. 물이 부족했기에 주민들은 지하수를 파서 물을 사용하거나 둠벙을 만들어 농업용수로 활용했다.

이 대문에 마을 곳곳에는 둠벙과 작은 규모의 저수지들이 많았다. 또 여기에 수양마을 주변 농경지들이 물빠짐이 좋은 토양인 탓에 물부족 현상을 더 부추겼다. 이 때문에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밤새 물을 살펴봐야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봉양저수지가 생기고 경지정리가 되면서 문제가 해결돼 요즘은 물부족 걱정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주작산과 덕룡산이 만나는 곳에는 신전면 수양마을과 도암면 월하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마을은 모두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귀농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신전면 수양마을에서 바라본 덕룡산이 들판의 푸른 보리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달 아래 위치한 월하마을
수양마을과 함께 덕룡산을 병풍처럼 두고 있는 마을중 월하마을이 있다. 월하마을은 수양마을과 인접한 마을이지만 행정구역은 도암면에 속한다. 두 마을 사이에 있는 하천을 사이로 도암면과 신전면이 나눠지는 셈이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월하마을도 수양마을과 비슷하다. 현재 70가구 정도가 마을내에 거주하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월하마을도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 60호이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귀농인들이 마을내로 유입되면서 70호까지 인구가 늘어났다. 월하마을도 수양마을처럼 수려한 자연경관이 귀농들이 유입되는 계기가 됐다.

다양한 전설 전해져 내려와
월하(月下)라는 마을 이름부터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이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예전에는 입구에 있는 월하소공원 주변에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경주이씨가 자리잡고 살았다. 이 때 추수가 끝나면 여러 제사에 쓸 쌀을 미리 자루에 담아 초당에 매달아두곤 했는데 나라의 관리가 마을을 찾게 됐고 가난했던 마을주민들은 제사에 쓸 쌀을 덜어 손님에게 흰쌀밥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에 감동을 받은 관리가 왕에게 알려 달 밑에 있다는 의미를 담아 월하정(月下亭)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이름도 월하마을 이라고 바뀌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밖에 마을 뒷산에 있는 용혈굴에도 전설이 전해진다. 이 산에 살던 3마리의 용이 승천하게 됐는데 바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3개의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용혈굴 바로 아래에는 백련사 소속의 암자인 용혈암이 있었다. 용혈굴은 월하마을뿐만 아니라 도암면에서도 아이들의 소풍장소로 이용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곳이었다. 마을주민들도 종종 놀러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곳 주변에 만덕광업이 들어서 규사를 채취하고 있어 분진 때문에 현재는 접근이 어려워졌다.

월하마을의 이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월하공원이 최근 우회도로 개통으로 사라져 아쉬움을 주고 있다.
수양마을과 월하마을 두 곳 모두다 덕룡산 아래 자리하고 있지만 두 마을에서 바라보는 덕룡산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수양마을에서 바라보는 덕룡산은 산 정상부가 뾰족한 송곳모양의 바위들이 줄지어 만덕산까지 이어지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주작산이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느낌이라면 덕룡산은 남성적인 아버지 느낌을 준다.

반면 월하마을에서 바라보는 덕룡산은 수양마을과는 달리 산 중턱에 규사를 채취하고 있는 공장 때문에 주변 경관을 해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 월하마을뿐만 아니라 수양마을까지 분진 때문에 피해를 입고있다고 주민들이 주장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덕룡산이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곳 업체에서 야간에 발파작업을 하면서 잠을 자다가 땅이 흔들려 주민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최근에는 야간발파 작업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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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에서 만난 사람] “청년들 많아 활기 넘치는 마을”- 신전면 수양마을 윤태선 이장

신전면 수양마을에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차를 타고 이동하던 윤태선(53·사진) 이장을 만났다. 윤 이장은 월하마을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수양마을로 이주해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윤 씨는 “수양마을은 웰빙잡곡을 생산하고 있는 덕룡산아랫동네 영농조합과 부촌영농조합법인 2개 조합이 활동하고 있는 보기 드문 마을”이라며 “경치도 빼어나고 마을주민들 인심도 넉넉해 살기 좋은 마을이다”고 말했다. 이어 윤 씨는 “마을에 젊은 청년들이 많아 활기넘치는 마을이며 최근에는 귀농인들도 대거 유입되고 있어 보기 드물게 가구수가 늘어나고 있는 마을중 하나이다”고 덧붙였다.

또 윤 씨는 “마을에 특별한 하나의 성씨가 모여사는 자작일촌이 아니라 다양한 성씨의 주민들이 모여살고 있다”며 “하지만 마을 주민들끼리 서로 숟가락 숫자까지 알 정도로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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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읽을거리] 

1. 원모퉁이 : 월하마을 인근에 일제시대 척식회사가 있어 곡물을 수송했던 부두였으며 척식회사가 있었다 하여 해사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간척지로  논으로 탈바꿈해 밥맛 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2. 베틀굴 : 월하마을 뒷산(마을사람들은 용혈산이라 부름)의 용혈굴 위쪽에 베틀굴이 있다. 옛날 전쟁 때 이 굴안에서 베틀을 놓고 베를 짰다는 전설이 전해져 베틀굴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이름의 유래는 주민들도 대부분 알지 못한다.

3. 가마등, 점등 : 수양마을 봉양저수지 부근에 위치했던 곳으로 그릇굽던 가마터와 연관이 있다고 전해진다. 점등은 점토가 분포됐던 곳으로 분청사기 파편이 많이 출토됐다고 한다. 가마등은 봉양제 인근에 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있어 부근을 가마등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봉양저수지가 들어서있다.

4. 동구리바위 : 덕룡산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중앙부근에 가로로 금이 그어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동구리바위의 뚜껑을 열어보려 하면 하늘에서 폭우와 낙뢰가 떨어져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제사를 지냈고 실제로 신전면 주민들은 가뭄이 심각할때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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