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 목사/나주 고막원교회. 강진읍 출신

황호신 선생이 생전에 스크랩했던 국내외 신문의 기사들이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그 내용을 강진사람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사진 = 유족 제공>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의 구원자요 해방자로 오신 예수를 소개하고
한국의 선각자적인 인물을 소개한 세례요한 같은 사람

황장로는 항상 까리따스회 수녀원장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공부를 하러 다녔다. 황장로는 강진약국 뒷 칸에 긴 책상과 의자를 배열하여 ‘다락방’을 만들었다. 이 다락방은 기독교서회가 출간하는 세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매일성경 묵상집이었다. 지금도 나온다. 그는 ‘다락방’ 영어성경공부반을 만들어서 가르쳤다. 공동번역성경과 굳 뉴스 바이블(Good News Bible), ‘영한대조 다락방’(The upper room)이 주 교재였다. 성경을 영어로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참여했다.

필자를 비롯한 다락방 회원들은 1972년 경에 벌써 ̒Good News Bible’을 읽었고, 카톨릭과 합작으로 공동번역이 나오자마자 강진 다락방에서는 이것을 텍스트로 사용했다. 참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로서 성경번역을 신구교가 함께 한 것이다. 신구교 합작을 통해서 비판적, 상호질문, 여러 사본대조와 원어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노작이었던 것이다.

‘강진약국 다락방 성경공부 방식’은 대충 이러했다. 다락방 교재(영문 포함)에서 성경본문을 읽고 명상한 후, 각자 소감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말하기. 다음은 아래에 나오는 참조성구를 공부하고, 다음은 상호토론, 소위 난상토론을 했다. 기상천외한 이야기도 나왔다.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황호신 선생은 마치 법관이 최종적으로 선고하듯이 결론을 내려주고 가르쳐 주었다. 참으로 민주적 방식의 성경공부였다.

우리는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을 성경대로 보고, 이 성경을 오늘의 우리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이 때부터 했던 것이다. 또한 성경은 읽을 수록 ‘Renewal’ ‘새롭게 다가온다’는 말씀을 늘 해주셨다. 그는 주로 영문으로 된 각 복음서를 대조하면서, 연구했다. 약 파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복음서 연구, 예수 연구와 후학들에게 가르치기가 그의 본업이었다. 

황호신 선생의 소천(召天)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처음으로 ‘페레스트로이카와 한반도 통일’이란 주제로 일본 교토 간사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다녀온 직후였다. 나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알지도 못했고, 제 집사람만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아직도 송구스러움을 떨칠 수 없다. 이러한 국제회의에 한국기독교협의회를 대표하여 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황호신 선생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강진약국 뒷방에는 해묵은 사상계, 신동아, 현대문학 등의 의식을 일깨우는 월간지와 서적들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었다. 필자는 궁핍했던 청년시절 이 해묵은 교양 월간잡지들을 빌려다가 모조리 뒤져서 읽었다.

당시 억압적인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우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이들이 강진약국에 모여들었다. 조경환 집사(농업), 엠네스티 활동을 했던 강봉남 장로(강진읍교회),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조병환 장로(강진읍교회), 교사로서 민주화운동하다 구속된 바 있는 박만철 선생(초등학교 교사), 박병택 집사(농협이사), 김영진 장로(전 농수산부장관, 5선국회의원), 필자 김병균 목사(고막원교회), 장광선 선생(미주한청필라델피아지부장), 김선태 님(공무원노조강진지부장), 조상배 장로(나눔과 섬김의 교회), 문장기 님(공무원), 김정선 님(농업), 전윤희 님(기장 목사), 김충선(인쇄업 사장) 등 시대정의에 목말라 하던 수많은 청장년들이 강진약국에 출입하면서 황선생으로부터 성경에 관한 지식과 시국에 관한 지혜을 듣고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황호신 장로는 강진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씨알의 소리’ ‘현존’의 보급에 앞장 서 있었다. 이러한 선진적인 잡지들은, 어둠 속의 빛이요,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 평화, 평등, 자유, 섬김, 나눔의 세상을 살아가자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버금하는 ‘복된 소식’이었던 것이다. 당시 황장로님의 입에서는 역사의 예수와 안병무가 끊어지지 않았다. 나도 이 영향을 받고 호남신학교(현 호남신학대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황호신 장로는 이 ‘현존’ 잡지를 한꺼번에 백여권씩 가지고 와서 열심히 보급했다. 황호신 선생은 이 민족과 나라에 자신을 바쳐 일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륜을 말했다기 보다는, 이 세상의 구원자요 해방자로 오신 예수를 소개하고 안병무같은 한국의 선각자적인 인물을 소개한 세례요한 같은 사람이었다. 황호신 장로는 안박사에게 용기를 주었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자유당 시절이나, 군부독재 시절에 강진에서 민주적 시국관이 뚜렷했던 사람은 강진에 몇 분이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황호신 선생은 줄곧 경찰당국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이제 대명천지 개혁세상이 되어서 사회주의 경력을 가진 독립유공자까지도 추서하고, 숨겨져 있던 민주유공자들도 발굴하여 그들의 노고를 인정해주는 때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고초를 겪었고,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운동에도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황호신 선생의 삶의 내력에 대해서 아직까지 말하는 사람이 없기에, 부족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내가 본 황호신 선생의 삶과 인품’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한 것이다.

황호신 장로는 강진에서 살았지만, 그의 활동영역은 광주요, 서울이었다. 안병무, 송기득 교수, 조아라 장로, 이애신 선생, 명노근 장로 등,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광주엠네스티 회원들, 한국 민주화 인권운동에 협력했던 선교사들과의 친교를 했다. 그는 물심양면으로 민주화, 인권 운동을 지원하고 격려하고 힘을 모아주었던 것이다. 그는 평신도로서 교회 안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총회총대로 가서 활동도 했고, 호남신학대학교 이사도 역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정신으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 암울한 세상을 바꾸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보기를 소원했다. 그는 어디서나 거침없이 불의의 세력에 대해서 비판도 했고, 대안도 제시했다. 그는 당시 청년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선생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황호신 장로와 강진약국, 그리고 출입자들은 강진 정보과 형사들의 표적이었고, 한 때는 시국관련하여 경찰에 불려가서 조서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는 시종 당당하였고 오히려 경찰들을 위압하였다. 황호신 선생은 암울했던 시대에 진실을 외쳤던 광야의 소리였다.

강진에 부자도 있고, 양심적인 사업가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웃 강대국이 한반도에서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반도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어떻게 이 민족이 자주하고 민주화되며, 통일세상을 이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했던 사람은 오직 황호신 선생 이 분이 강진에서는 선구자였다.

황호신 선생은 이 땅에서 이름없이 살아간 ‘하나님 나라’의 추동자였다. 황호신 선생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산사람이 아니라, 이 나라와 세상을 염려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간 의인이요,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