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강진사람들을 아프게 했던 그 일

‘1939년 살인사건이 1974년 갈갈이 사건으로 둔갑’
치정에 의한 단순살인사건, 작가의 상상력으로 풍선만들어
야화수준의 방송이 사실처럼 전달… 강진의 이미지 심각하게 왜곡

1973년 겨울 발행된 법창야화 강진갈갈이사건 단행본과 책속의 삽화모습이다. 책은 베스트셀러였다. 맨 오른쪽은 법창야화 1화에서 범인인 고재웅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배우 변희봉 씨.
강진갈갈이 사건이 법창야화 제1화로 방송된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40대 후반 이상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직도 ‘강진=갈갈이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건의 발생시기나 사건내용, 방송전달과정등에서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였다. 이 사건은 사건이 사건이 아니라 법창야화 1호가 된 것 자체가 사건이라고 해석해야 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974년 4월, 저녁 10시가 되면 전국의 거리가 조용해졌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지만 사람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밤 10시 5분부터 MBC라디오로 방송된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 사건’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사건은 큰 인기를 누렸다. 매주 시청자 사은퀴즈가 나가면 10~20만통의 엽서가 쏟아졌다. 당시 라디오 보급률이 98.7%에 달했다.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는 것은 당시에도 그렇게 흔한 사건이 아니였다. 전국의 청취자들이 ‘강진갈갈이 사건’에, 그리고 무엇보다 강진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때부터 ‘강진=갈갈이 사건’으로 통했다. 지역주민들도 제발 그일만은 묻어두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은 강진사람들이 가장 잊어버리고 싶은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전국의 4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에게 강진을 가장 생생하게 각인시키는 ‘사건’이였다. 그럼 ‘강진갈갈이 사건’은 강진의 이미지를 그토록 철저하게 규정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사건이였을까. 또 ‘강진갈갈이 사건’은 소문대로 그렇게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죽인 사건이였을까.

‘강진갈갈이 사건’은 1939년 강진군 군동면 한 야산에서 일어난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이였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토막살인 사건이였다. 50년, 60년대 신문을 분석해 보면 그보다 잔인한 살인사건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1939년에 일어난 강진의 살인사건이 마치 70년대 초반에나 일어난 것처럼 전국의 화젯거리가 됐을까. 

우선 ‘강진갈갈이 사건’의 발생 시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진갈갈이 사건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사건으로 알고 있다. 외지 사람들은 거의 100% 그렇게 답변한다. 법창야화가 방송된 시기와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일치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10월 30일에 일어난 일이였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드라마가 방송된 1973년을 기준으로 34년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마치 엊그제 일어난 사건마냥 전국의 국민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본지가 1974년 4월부터 1980년 10월까지 법창야화로 방송된 47개 사건을 분석한 결과 10년 이상된 사건을 소재로한 것은 2~3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모두 한국전쟁 이후의 사건이였고 나머지는 1974년을 기준으로 모두 평균 5년 이내에 발생했던 사건이였다. 

제2화로 방송된 무등산연쇄살인사건은 1968년 사건이였고, 제4화 부산범전동여인숙 살인사건은 1962년 사건이였다. 제6화 가짜 이강석사건 정도가 1957년으로 가장 오래된 사건중의 하나였다. 제7화 비정의 두 사나이는 그해 7월에 일어났던 사건이였다.

70년대 중반이후에는 법창야화가 시작된 1974년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이 주 소재들이였다. 청취자들에게 강진갈갈이 사건은 당연히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전달됐다. 이렇듯 강진갈갈이 사건은 사건의 발생시기에서부터 청취자들에게 심각한 오류를 전달하며 시작됐다.

당시 법창야화의 기획목표는 ‘밝은 사회건설과 인간회복’이였다. 오래된 사건은 그런 법창야화 기획 목표와도 어울리지 않은 것이였다. 가장 최근의 사건을 취급해야 그것을 거울삼아 밝은사회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98.7%의 보급률을 자랑했던 라디오의 위력은 막강했다. 치정과 도박, 폭력등 흥미의 3대 요소를 적절히 가미한 이 드라마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시 법창야화에 출연했던 성우중에 지금도 유명한 배우가 변희봉씨다. 그는 전라도사투리를 잘한 덕분에 주인공 역을 맡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970년대 초반 명지대학교부설 방송문화연구소가 라디오 청취정도를 조사한 결과 각 가정의 라디오 보급률이 98.7%에 달했고, 이중 58.7%가 개인전용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며 이중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전남대 5.18 연구소 윤영덕 연구교수는 “살인사건은 다른 측면이 있겠지만 일단 일제강점기때 일어났던 모든 사건은 그것을 사회화 하는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국권이 침탈당하고 주민들의 주권과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한 시기였다. 주민들은 희망을 잃고 끼니때우기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아마도 1939년은 일본의 수탈이 가장 심각했던 때였을 것이다. 당시의 살인사건을 70년대 초반에 드라마화 한 것은 심각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일이였다”고 말했다.

‘강진갈갈이 사건’을 극화한 최풍(79년 사망)씨는 대본을 당시 사건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후 적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래 미국에서 당시 군동 방위병으로 근무했던 독자의 편지에 따르면 최풍작가는 당시 사건현장에서 아주 많이 떨어진 군동의 한 마을 이장이야기를 듣고 전체적인 줄거리를 만들었다. 재판자료나 검찰의 공소장같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대본이 아니였던 것이다. 

‘강진갈갈이’ A씨는 1940년 어느날 대구고등법원에서 1심과 같은 살인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된다.
당시에는 고등법원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지법 산하 1심 판결에 대한 항소는 대구고등법원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대구고등법원측은 물론 대구고검, 국가기록원등에도 사건기록은 없다. 독립운동 판결문과 같은 특수한 사건 외에 일반 형사사건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폐기한다는게 당국의 설명이였다. 설령 판결문이 존재하더라도 열람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누구도 열람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니까 인기작가 최풍씨는 ‘강진갈갈이 사건’의 대본을 사건이 일어난 30년 후에, 현지주민들의 구전등을 취합해 거대한 법창야화 1화를 집필했던 것이다.

MBC측에는 당시 법창야화1화 대본이 보존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최풍씨가 1974년 12월, 그러니까 법창야화가 그해 4월 시작된 후 6개월만에 쓴 ‘문화방송 연속실화극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자 대본을 소설형식으로 개작해 책으로 펴낸 것이다. 당시에는 이 책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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