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 목사/고막원교회 목사, 광주전남 평화통일을 여는 사람들 상임의장

강진서 조용히 민주주의의 바람 일으켰던 사람

황호신 선생
약학대 졸업, 학창시절에 독립운동
‘강진약국’70년대 민주인사들의 아지트
돈독한 신앙생활, 주변사람들에게 큰 영향끼쳐

내고향 강진평야 한복판을 탐진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장흥들을 굽이굽이 돌아 나오고, 다른 한 가닥은 작천 방매들 청구를 지나 장흥에서 합수되어, 강진 군동 평야를 가로질러, 이골 저골 아홉 골 물이 모여 구강포라 불리운다.

이 탐진강은 56km를 흘러 강진만을 지나 남해로 나아간다. 그 옛날 탐라국과 인적, 물적 교역이 있었던 곳이 강진이었다. 그 이름을 탐진(耽津), 즉 오늘날 강진읍은 이름도 정겨운 북산, 우두봉, 피파산, 관모봉, 만덕산, 신학산, 서기산에 옹성처럼 둘려 싸여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천혜적 지세와 좌청룡 우백호의 균형잡힌 땅이렸다....

이른 봄이면 핏빛 동백꽃 흐드러지게 피는 남도의 정취가 물씬 나는 곳이라. 가히 명품 산수와 옥토, 게다가 짱뚱어가 펄펄 뛰고 꽃게가 기어 다니는 공해없는 개펄이 아스라히 펼쳐저 있다. 강진 사의재(四宜齊)를 거쳐, 보은산방(報恩山房), 등을 거쳐서 만덕산 자락 갯마을 귤동 초당에서 10년간 유배살이를 하므로, 다산이 강진에 머문 기간은 18년이란 강산이 두 번 변하는 기인 세월이었다.

강진만 갈대숲에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숨결이 아스라이 들려온다. 우국충정, 민초사랑으로 후학 양성하고, 밤새워 목민심서, 경세유표, 여유당전서 집필했던 다산 선생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 정신 스며있는 땅, 강진은 역사의 한숨과 시대를 앞선 학문 그리고 고즈넉한 자연풍광이 어울러진 곳이다. 역사의 아픈 사연 담은 강진만 짠물은 대섬, 가우도 사이로 천년세월 두고 찰삭거리며 들고 난다.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던 시문학파 현구는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라고 애절하게 노래했던가!

같은 시문학파 영랑은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라고 암울한 일제시대 악랄한 식민통치의 고통 속에서 절규했나 보다. 그래서 역사기행 답사가 유홍준은 강진 땅을 ‘남도답사 일번지’라고 불렀을까........ 필자가 강진을 떠나온지도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버쩍 흘렀다.

어린 시절 해질녘, 옥샘에서 서기산을 바라보는 진홍빛 저녁놀, 북산자락 대숲에 싸인 옛날 강진읍 교회 저녁 종소리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내 상념 속에 환상의 실루엣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시절(강진중앙국민학교 48회졸업) 보은산에서 구강포를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소년의 꿈을 실은 돛단배를 띠어보았던 잔잔한 기억도 남아있다.

필자는 고향의 산하가 주는 짠한 그리움과 포근함을 떠올리면서, 강진의 선배제현 중에 후학들에게 크나큰 교훈 그리고 예수신앙과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떠나간 황호신 선생의 삶의 궤적을 잠깐 돌이키고자 한다.
 
□민족과 고난을 함께 한 황호신 선생의 집안내력과 청년시절
강진읍 동성리에 있었던 황호신 선생의 강진약국의 옛 모습이다. <사진 = 황호신 선생 유족 제공>
황호신 장로는 1920년대 초 강진의 아전계급인 창원황씨 호장 집안에서 출생했다.(1922년-1989년) 그는 일제시대부터 사법서사로 오래 일한 바있는 황복규 선생의 장남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강진에서는 아전들이 상당한 세력과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선친인 황복규 장로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강진읍교회에서부터 장로를 오래 지냈다.

일제 때부터 사법서사로 활동했고, 해방 이후에는 해남, 강진지역 치안관을 지낸 바 있다. 이러한 우익 경력과 기독교 장로로서 6. 25 당시에는 인민군치하에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강진군 도암면 논정마을 배정태장로 가정에서 숨어 지냈다. 그는 근검절약하여 자수성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황복규 장로는 교회에는 철저한 보수신앙으로, 목회자를 협력하고, 충성하고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지만, 인근 사회에서는 인심좋고 후덕하다는 평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교회와 천직인 사법서사와 가정만을 오고 갔던 성실한 인물이었다.

황호신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강진중앙국민학교, 광주서중을 다녔다. 서중시절에는 테니스 선수로 날리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치열했던 일제 말기, 서울약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해방 후 학제 개편으로, 서울대 약학대를 졸업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청장년 때까지 강진읍교회(현 기장)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황선생의 미망인 오상선 여사(집사)는 어려서 안동교회 시절부터 찬양대로 봉사했다. 그의 여동생들은 모두 강진 중앙교회 시절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열심을 다해 활동했다. 필자는 주일학교 시절 이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친 황복규 장로와 몇몇 교인들은 강진읍교회에서 나와 강진중앙교회를 개척했다.(예장통합) 그 후 파란의 세월을 거쳐 강진읍사무소 앞에 강진영신교회를 또 다시 설립했다. 그는 말년까지 장로로 봉사하다가 일생을 교회에서 마친 진보적 ‘예수쟁이’였다.

그는 해방 직후, 민족의 격동기에 낭산 김준연 선생(제헌의원, 법무부장관역임)의 비서관을 지냈다. 독립운동가로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 선생과 함께 낭산 선생 비서관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그가 약국을 개업했던 곳은 일정시대부터 유곽이었던 소위 사창가 부근이었다. 당시 그의 약국에는 일제시대부터 주먹이었던 김두한과 그의 부하들도 가끔 놀러와서 형님 동생하고 지낼 정도로 사회적 오지랖도 넓었다.
 
김병균 목사
황호신 청년은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지병인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을 했다. 그는 건강상 서울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6. 25가 지난 후에 낙향해서 강진읍에 ‘강진약국’을 차렸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와 말년을 기후가 온화한 남도의 끝자락 강진에서 여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가 운영하던 강진약국은 야당 인사들의 아지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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