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와 금속활자, 고려가 자랑한 인류 최고 상품

고려시대 강진, 청자제작 부분 세계 최고기술 보유

<좌측부터>강진에서 생산된 청자기와와 청자어룡주전자의 모습이다. 개경에서는 청자기와의 파편이 발견됐고 어룡주전자는 청자편과 함께 개경박물관의 최고 소장품이였다.
남과 북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개성 만월대에서 현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1377년 간행)보다 앞서는 고려시대 금속활자가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개성 만월대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919년 개성 송악산 기슭에 건설한 궁궐의 터.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됐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2007년부터 남북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 조사를 시작해 올해 제7차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이 금속활자는 만월대가 소실된 1361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실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는 남북에 각각 1점씩뿐인 데다 발굴 경위와 출토지가 명확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발굴조사단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이날까지 진행된 제7차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에서 19동의 건물지와 명문 기와, 청자, 용두 등 3500여점이 출토됐다. 금속활자와 청자는 당시 기술로서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유물이다.

만월대는 청자의 역사와 관련해서 더 없이 중요한 곳이다. 이번에도 청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만월대 부근 어디를 파도 청자편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만월대는 고려청자의 성지였다.

그곳에 양이정이란 정자가 있었고 양이정의 지붕이 청자기와로 씌워졌다는 고려사 기록은 청자 제작 기술의 최고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사 의종왕 11년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의종)이 왕업을 번영케 하고자 궁궐옆에 있던 민가 50채를 헐고 수덕궁이란 새 궁중건물을 지을제, 정원에다가 양이정을 세웠는데 청자기와를 올렸다’ 역사가들은 청자라는 당대 최고의 예술품으로 기와를 만들었다는 기록에 감탄을 자아냈다.

청자기와편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만월대에서 수습돼 이 기록을 뒷받침했다. 일본 상인이 소장한 기와편이 한두점 더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청자기와가 도대체 어디에서 생산됐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개경 사람들도 개경 주변의 어느지역에서 청자기와와 청자를 생산했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개성박물관장이였던 고유섭은 개성에서 확보한 유물들 중에 청자어룡주전자와 깨진 청자기와를 개성박물관의 대표 유물로 꼽았다. 고유섭은 개성박물관을 찾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에게 자주 이런말을 했다.

“청자기와를 일일이 만들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청자기와 제조기술은 고려에만 있었습니다.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 뿐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다만 이렇게 깨진 조각으로만 몇 점 발견되었을 뿐이라는게 아쉽습니다”<최순우 선생 저술 인용>

청자기와는 최순우 관장과 정양모 관장등이 주도한 국립중앙박물관 발굴팀이 1964년 7월 대구 사당리 이용희 청자장의 집 앞마당에서 무더기로 발견해 냈다. 이곳에서는 암키와, 암· 수 막새기와 등 각종 청자기와가 쏟아졌다.

거의 완형에 가까운 것도 있고 서· 누· 남면등 지붕의 위치를 가리키는 글자가 음각된 것도 있었다. 이 정도면 이곳이 개성 만월대에 있던 양이정을 덮은 청자기와를 만든 공장자리였고, 청자기와가 지붕의 어느쪽에 위치할 것까지 계산해 구워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였다.
 
이번에 남북발굴단이 발표한 7차 조사결과에서는 아직까지 청자기와편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없다. 그러나 이번에 금속활자 편이 발견되듯 강진 사람들을 기분좋게 할 획기적인 청자편들이 혹시 나올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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