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국회의원 선거 세차례… 윤재명, 황호동, 길전식 정계풍미

8대 윤재명·유수현·박종면 입후보… 윤재명 당선
9대 길전식·정간용·황호동 입후보… 길전식 황호동 금배지
10대 길전식·황호동·오석보 윤재명·이선동·이정채·최수영 입후보… 길전식 윤재명 승리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8대, 9대. 10대 국회의원 선거 등 세 번의 총선이 치러졌다. 50대 이상 주민들이라면 1년 365일 동안 방 한켠의 벽에 붙어 있던 국회의원 얼굴이 들어간 달력의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때 이름을 날린 국회의원이 윤재명, 황호동, 길전식씨등이다. 이 세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70년대 강진의 정치를 풍미했다. 

□제8대 국회
(1971.7.1 ~ 1972.10.17)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강진은 영암과 함께 전남 제13선거구로 분류됐다. 총선에 출마한 후보는 윤재명(尹在明·39, 공화당) · 유수현(劉守鉉·55,신민당) · 박종면(朴鍾勉·63,국민당)후보 등 모두 3명이었다. 윤재명 후보와 유수현 후보는 강진 출신이고, 박종면 후보는 영암 출신.

선거전은 윤재명 후보와 유수현 후보 간 양자 대결로 전개됐다. 지역 인지도와 이력 등 두 후보의 경쟁력은 영암출신 박종면 후보와 현격한 차이가 났다. 사실상 강진 출신 후보 간 맞대결로 선거전이 진행됐다. 
윤 후보와 유 후보는 지난 6대 총선 때부터 세 번째 맞붙었다. 6대 총선 때는 둘이 낙선하고 김준연 후보가 당선됐었고, 7대 총선 때는 윤 후보가 당선되고 유 후보는 차점으로 낙선했었다.  

윤 후보는 집권여당 후보라는 프리미엄과 함께, 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의정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성장가능성이 높은 정치신예로 평가받고 있었다. 유 후보는 5대~7대 총선, 6대 보선 등 4차례나 출마한 적이 있고 6대 보선(광주)에서 당선되는 등 선거경험이 풍부하고 인지도가 높았다.

선거 결과, 윤 후보의 재선 성공과 유 후보의 낙선으로 끝났다. 윤 후보는 총 유효투표수(8만9천926표)의 59.88%인 5만3천852표를 득표했고, 유 후보는 3만5천789표(39.80%)를 얻어 또다시 2위에 그쳤고, 전남농민회장을 역임한 박종면 후보는 고작 285표(0.32%)를 얻어 전남에서 최소득표자란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5·25 총선에서 유수현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 윤재명 의원은 국회와 당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공화당 원내부총무를 맡았다. 당초 국회직인 농수산위원장으로 내정됐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당부로 원내부총무를 맡게 됐다. 박 대통령은 총선 후 김재순 원내총무와 농수산위원장에 내정된 윤재명 의원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했다.

박 대통령은 “야당에 젊은 의원들이 많아서 윤 의원이 아니면 젊은 야당의원들과 접촉이나 대화가 어렵다고 김재순 총무가 말하더라. 농수산위원장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해도 된다”면서 부총무직을 권유했다.

윤 의원은 대통령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어 원내부총무(야당·언론담당)를 맡았다. 71년은 대선과 총선을 치렀고, 각종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여야관계가 불편할 때였다. 하지만, 윤 의원은 ‘조정의 명수’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부총무 역할을 잘 소화했다. 야당의원들은 “사교술과 인간관계에 있어 본능적으로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라고 평을 했고, 언론과의 관계도 좋았다.

집권여당에서 ‘잘 나가던’ 윤 의원도 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치성 내무장관 불신임안 가결사건인 ‘10·2 항명파동’ 이 바로 그 것. 1971년 10월 2일 신민당이 제기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이 일부 공화당 의원의 가세로 가결됨으로써 공화당의 숙당선풍으로 이어진 사건을 말한다.

당시 원내 부총무로 활약 중이던 윤 의원은, 오치성 장관 해임안이 가결된 다음날인 10월 3일 서울 명륜동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20여명의 동료의원들도 끌려갔다. 마침 이날은 추석날이었다.

중정요원은 다짜고짜 윤 의원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김성곤 의원한테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 반란 지령을 받았느냐”고 추궁했다. 옆방에서도 누군지 모르지만 얻어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 주눅이 들게 했다. 윤 의원은 얻어맞으면서도 “절대 돈을 받은 일도, 지령을 받은 일도 없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자, 다음날 새벽 3시께 발설하지 말라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제9대 국회
(1973.3.12 ~ 1979.3.11)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유신체제하인 1973년 2월27일 실시됐다. 선거 방식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던 8대 총선 때와 달리, 선거구별로 다수득표자 2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또 전국구 제도를 폐지하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제청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국구 성격의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 국회의원을 간접 선출했다. 지역구 의원의 임기는 의정사상 가장 긴 6년이었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한 유정회 의원의 임기는 3년이었다. 제3공화국 때에는 허용하지 않았던 무소속 출마를 허용했고, 후보자 기탁금제도를 도입했으며, 무투표 당선을 인정했다.

강진은 9대 총선부터 인근 장흥․영암․완도와 한 선거구(전남 제8선거구)를 이뤘다. 전남 제8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는 길전식(吉典植․49, 공화당) ․ 정간용(鄭幹鎔․51,공화당) ․ 황호동(黃鎬東․37,신민당)후보 등 모두 3명. 공화당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2명의 후보를 복수 공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줬다.

길 후보는 장흥, 정 후보는 완도, 황 후보는 강진 등 세 후보의 출신지가 모두 달랐다. 처음으로 한 선거구가 된 4개 군 중에서, 영암만 제외하고 군별로 1인씩 출마했다.

선거전은 공화당 후보인 길전식․정간용 후보와 신민당 황호동 후보의 정당대결로 진행됐다. 한 선거구에서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바뀐 이후 처음 치러지는 총선이어서 3명 후보 중 1명만 탈락하는 선거였다.

길전식 후보는 당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실세이자 3선(6~8대) 의원 출신이고, 정간용 후보는 완도수고 교감을 지냈고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완도선거구에서 7,8대 의원을 지낸 재선의원 출신. 정치 신인 황호동 후보는 올림픽에 국가대표 역도선수로 여러 차례 출전해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선거 결과, 길전식 후보와 황호동 후보가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해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길 후보는 유효득표수(20만3천220표)의 43.81%인 8만9천35표를 득표해 4선에 성공했다. 황 후보는 유효득표수의 28.65%인 5만8천218표를 얻어 2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출마가 예상됐던 윤재명 의원(7,8대 의원)은 불출마했다. 선거구가 인근 지역과 통합되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 윤 의원은, 선거운동용 달력까지 인쇄해 놓고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길전식 후보가 윤 의원에게 “유정회 의원으로 추천하겠다”고 선거지원을 부탁해 그 약속을 믿고 불출마했다.

그러나 길전식 후보는 윤 의원을 유정회 의원으로 추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윤 의원은 9대 국회에 도전하지도 못하고 정치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남강(南崗) 길전식 의원(1924.10~2011.12)은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 출신이다. 길 의원은 서울 경복고와 연희대(현 연세대) 문과를 졸업하고 육사(8기)에 들어가 방첩부대 정보처장 시절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육사 동기인 길 의원은 5․16이후 대령으로 예편, 중앙정보부 3국장과 공화당 원내부총무, 국회 상공위원장, 공화당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황호동 의원(1936.12~2010.3)은 이색 정치인이었다. 강진군 대구면 백사리에서 태어난 황 의원은, 강진농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국가대표 역도선수 출신.
지난 1958년 일본 도쿄 아시안게임(은메달) 출전을 시작으로 64년 도쿄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금메달), 68년 멕시코 올림픽,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메달)까지 아시아를 대표한 역사(力士)였다. 젊은 시절 그는 키 180cm에 몸무게가 110kg이나 되는 당시로선 거구였다. 

특히 황의원은 현역의원 신분으로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슈퍼헤비급에 출전, 은메달을 획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선수생활에서 은퇴하고 6년 후인 74년 현역 국회의원 시절이었다.

당시 황의원은 선수로선 나이도 많았고, 체중도 5kg이나 미달돼 탈락위기에 처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맹물을 엄청나게 마셔 겨우 체중(110kg)을 맞춘 뒤 계체량 측정을 통과하고 출전했다. 황 의원은 이란선수에게 져 은메달을 따는데 만족해야 했다. 

의협심이 강했던 황의원은,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사표를 내고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제10대국회
(1979.3.12 ~ 1980.10.27)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됐다. 10대 총선도 9대 총선처럼 선거구당 2명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선택했다. 10대 총선 때 전남 제8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에서 금배지에 도전한 후보는 모두 7명. 이 가운데 정당후보는 길전식(吉典植·54, 공화당) · 황호동(黃鎬東·42, 신민당) · 오석보(吳石堡·39, 민주통일당) 후보 등 3명이었고, 무소속 후보는 윤재명(尹在明·46) · 이선동(李先東·45) · 이정채(李正彩·29) · 최수영(崔洙泳·35) 후보 등 4명이었다.

선거전은 정당소속인 길전식 · 황호동 · 오석보 후보와 친여(親與) 무소속 윤재명 후보, 친야(親野) 무소속 이선동 후보가 치열한 5파전을 벌였다.

선거전이 종반에 들어서면서 길전식 후보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등으로 확실한 우세를 보였다. 오히려 황호동 · 윤재명 · 이선동 · 오석보 후보 등 4명의 2위 다툼이 더 관심을 끌었다. 2위권 후보들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금메달’보다는 ‘은메달’로 국회에 진출해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길전식 후보는 집권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4선(6~9대) 의원 출신답게 전국 최다 득표를 목표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는 읍·면 단위는 물론 마을 단위까지 당원교육을 완료하고, 군별 공약을 20개씩 제시해 지역구민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황호동 후보는 현역 의원(9대국회) 신분으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역도경기에 출전, 은메달을 획득해 국위를 선양한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고 정부 실정을 비판하면서 표밭을 누볐다. 그는 30여명의 면책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조직 확대를 독려하기도 했다.

윤재명 의원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던 충남 당진의 ’삽교천 준공식’행사에 참석했다.(사진 오른쪽부분 흰색 자료를 들고 있는 이가 윤재명 의원)

윤재명 후보는 선거 직전에 무소속 출마를 위해 공화당을 탈당, 9대 국회 당시 유정회 의원 추천 약속을 어긴 길전식 후보와 한판 대결을 벌였다. 길 후보는 친여 성향 표를 잠식해가는 윤 후보를 견제했다. 윤 후보의 주요 선거 책임자들을 설악산이나 제주도로 반강제 여행을 보내기도 했고, 영암에서는 타이어를 빼버린 대형트럭을 선거사무실 입구에 세워놓아 기동력을 잃게 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예상대로 길전식 후보가 여유 있게 1위로 당선되었고, 2위는 9대 총선 때 타의에 의해 불출마했던 윤재명 후보가 차지, 마침내 3선에 성공했다. 길 후보는 유효투표수(18만8천336표)의 39.65%인 7만4천668표를 얻어 5선 의원이 됐다.

윤재명 후보는 유효득표수의 16.55%인 3만1천167표를 득표해 2위로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1위와 2위간 표 차이는 4만3천5백여 표나 됐다. 장흥 출신인 길전식 의원(1924.10 ~ 2011.12)은 10대 총선에 당선돼 5선의원이 됐다. 패배 기록이 한 번도 없이 6대 총선 부터 내리 다섯 번이나 당선됐다.

도암면 만덕리 출신인 윤재명 의원(1931.11.5~ )은 7,8대 총선에 이어 10대 총선에 당선돼 3선에 성공, 중진 정치인으로의 발판을 다졌다. 그는 6년간의 정치공백을 극복하고 무소속으로 당선돼 재기에 성공했다.

[광복 70주년 기획시리즈. 우리 강진은 이렇게 살았다] 이번주 기사는 임영상 칼럼니스트가 2012년 1월부터 2012년 6월까지 <강진일보>에 연재한 [총선으로 본 강진정치사] 기사를 요약해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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