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1970년‘김현구 시집’산파역 임상호 전 강진신협이사장

현구선생 사후 20년만의 첫 시집 발간
현구를 살리고 강진의 시 역사를 다시 일으킨 역사
정문석, 주전이, 김옥애, 정복상씨 등 편집위원 참여
양장 표지에 금박 제목, 당시로서는 최고급 형식
500여부 발간, 전국의 대학도서관에 발송
현구시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 불러일으켜

1970년대 초 강진은 문학의 전성기였다. 사람들은 ‘영랑다방’과 ‘다산다방’에 모이면 담배를 피우며 시를 읖조렸다. 자칭 시인들은 등사지에 인쇄한 펜글씨로된 시를 돌려 읽으며 인생을 이야기하고 청춘을 노래했다. 다방에는 왜 그리 동양화가 많이 걸렸던지 어느 다방에 가나 고급 동양화가 걸리지 않은 집이 없었다.

70년 어느날 이였다. 성요셉여고에서 국어선생님을 하고 있던 임상호 선생에게 6.25때 작고한 현구선생의 시집을 발간해 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임선생은 이미 오래전부터 현구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으나 지역주민들은 까맣게 모르는 시인이였다. 그의 절친 영랑 김윤식의 시는 국어교과서에도 게재돼 누구나 한구절을 읊을 정도였지만 현구의 시는 1950년 10월 3일 그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속에 지워진 것이었다.

임상호 선생에게 시집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사람은 현구선생의 동생이였던 김현석 목사였다. 교회일로 자주 만났던 두 사람은 현구선생이 시문학지에 시를 게재할 정도로 이름있는 시인이였고, 그가 발표했던 시와 유작시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주고 받았었다. 시를 만들 수 있는 재료는 어느정도 갖춰진 셈이였다. 재정적 뒷받침은 현구선생의 둘째 아들인 원배씨가 하기로 했다.

출판의 총괄을 임상호 선생이 맡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시집만들기 작업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시집을 만들어야 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교열, 인쇄작업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작업들이 진행됐습니다”

지난 20일 오후 강진읍 신학마을 집에서 만난 임상호(83) 선생은 40여년전 일을 회고하면서 70년대 시집을 만들던 그 때로 금방이라도 돌아가는듯 했다. 가장 먼저 진행된게 편집위원회를 구성한 일이였다. 편집위원회에는 정문석, 주전이, 김옥애, 정복상, 한옥근씨등 당시 강진에서 문학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유족들에게서 원고들이 넘어 왔다. 20년 동안 누런봉투속에 담겨 있던 색바란 육필원고들이었다. 금방이라도 현구선생의 음성이 들리는 듯한 원고들이었다. 편집위원들은 시를 쭉 펼쳐놓고 읽으면서 토씨 하나하나를 점검해 가기 시작했다. 시의 원작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시를 차례로 정리하는 작업들이 오랫동안 진행됐다.

1941년 출판을 시도하던 과정중에서 현구선생이 직접 적은 서문을 읽을 때는 편집위원들의 몸에서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현구선생의 시와 글은 자신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현구선생의 절친한 친구였던 차부진선생에게 ‘내가 아는 현구시인’이란 글을 청탁해서 받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출판사는 서울로 정했다. 당시로서는 강진과 서울을 오가며 책을 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전국에서 최고의 시집을 낸다는 목표였기 때문에 고생을 등뒤에 짊어지기로 했다.

시집이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표지는 양장으로 하기로 했다. 70년대에 우리나라 서점에 표지가 양장으로 된 시집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가난한 시인들이 비싼 양장표지로 해서 시집을 만들 여력들이 없었던 것이다. 임상호 선생을 비롯한 편집위원들과 유족들은 표지는 양장으로 하고, 시집의 제목은 금박을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시집의 제목을 금박으로 한 시집 또한 찾기 어려운 시대였다.

1970년 5월 5일 기다리던 현구시집이 책으로 나왔다. 현구선생의 유언대로 책은 비매품으로 해서 500여권을 발행했다. 현구시가 그의 사후 20년만에 세상에 나온 순간이였다. 고향 강진에서는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였다. 이 시집이 발간된 이후 비로소 현구는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늘어났다. 1970년 5월 5일 현구시집의 발간은 현구라는 한 시인을 되살린 일이자, 강진의 시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출발점이였다.

임상호 선생은 “그정도 고급스런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강진에 축적돼 있던 문학역량이 큰 몫을 했다”며 “책이 발간된 후 현구선생이 다양하게 조명돼 평생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임상호 선생은 성요셉여고에서 17년 동안 국어선생님으로 재직하다가 지역 신협운동에 뛰어들어 23년 동안 신협이사장직을 맡아 활동했으며 10여년전 은퇴했다. 현재 학명마을에서 감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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