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강진쌀 배에 싣고 제주도로 팔러다녀

윗 사진은 지금도 제주도의 한라산 목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말들의 모습이다. 아래사진은 1980년대 초반 칠량 봉황리에서 제주도로 팔러가기 위해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옹기들의 모습이다. 이때도 쌀이 제주도로 많이 실려갔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조선시대, 공출마 마량(馬梁)거쳐 한양 운송

고려시대 학자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려 전하고 있는 한시가 있다.
경주이씨인 익재선생은 강진과 친숙한 인물인데, 강진에 살던 경주이씨 효정공 이경이 익재공이 한때 강진을 들려가며 읊은 시가 있는 것을 근거로 사우를 건립해 현재 대구면 구수리 귀곡사에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익재난고’에 따르면 제주도인들은 생산되는 농산물이 적어 육지인 전라도지방에서 상인들이 청자와 쌀을 팔러오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배가 자주 온게 아니여서 오랫동안 배가 오지 않을 때는 북풍이 불어 보내는 이 장사꾼 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관의 말들이 논밭을 짓밟아 백성들은 경작할 땅조차 없게 되었고, 거기다가 관리들은 북새를 이루어 백성들을 더욱 못살게 해서 섬에서도 여러 차례 변고가 일어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

“밭두덩의 보리야 헝클어 쓰러져도/ 언덕의 삼이야 두 갈래 나건 말건/청자와 백미를 가득싣고서/북풍에 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구나/

고려시대에 청자와 쌀을 가득 실은 배가 제주도에 왔다는 것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청자와 백미를 가득싣고 오는 배가 어디에서 오는 지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때 남부지방에서 청자를 생산한 곳이 강진이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 배에 실린 쌀 역시 강진산이였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제주 사람들은 고려시대때에도 강진에서 수송된 쌀을 먹었던 것이다.  

고려청자연구의 원조격으로 해방전 개성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우현 고유섭 선생은 익재선생이 한시속에 기록한 전라도 상인이란 강진요의 청자를 싣고 다니는 상인이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익재선생이 활동하던 시기가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다. 강진청자의 전성기의 끝자락일 때다. 이때 강진의 배가 쌀과 청자를 싣고 제주를 오가며 상업활동을 했던 것이다. 이렇듯 강진은 고대로부터 제주에 쌀을 공급하는 주요 시장이었다. 지난호<강진일보 188호 5면>에 기술한데로 강진과 제주의 쌀 거래는 조선시대들어 본격화되고 규모화 됐다.  

강진에서 마량(馬梁)이란 지명이 역사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도 세종 6년 때인 1429년이다. 지명의 의미만을 두고 볼 때 비슷한 시기에 마량에 이미 제주마가 도착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강진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단종실록에 있다. 단종 1년(1453) 조선왕조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계참곶이(界站串)는 둘레가 90리(里)이고, 토산이 비후(肥厚)하고 물과 풀이 모두 족(足)하여 말 1천 필을 놓아 기를 수 있으니 목장을 설치해야 한다”고 청한 내용이 나온다.

1801년~1818년까지 강진에서 유배를 살았던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 제주말이 강진에 도착해 일어나는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배가 육지에 닿아서 말이 내리면 제주 사람들은 돌아가 버렸다. 이 때문에 말을 다룰줄 모르는 육지사람들은 말을 놓치기 일쑤였고, 말들이 부상을 입어 골절을 당할때도 부지기수였다. 이에따라 여러고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두어 제주사람들에게 주면서 서울까지 말을 몰고 가도록 간청해야 했다. 돈과 곡식이 마음에 충족되지 않으면 말을 흩어지게 하여 벼와 보리를 짓밟게 하면서 며칠을 두고 나가지 않았다. 말이 도착한 지역의 현감까지 나서 관복을 갖춰 말을 맞이할 정도가 되어야 제주사람들은 말을 일부러 흩어지지 않게 했다.’

이 대목을 보면 공출마를 육지까지 실어온 제주사람들의 자부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는 공마수송이 국가적인 운송체계가 부재했고, 상당 부분을 현지 주민들의 임시변통식의 부담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 제주의 공출마는 언제까지 바다를 건너왔을까. 조선정사에는 1871년 중반까지 공마를 거론한 기록이 마지막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하면 제주에서 말이 남해바다를 건너 강진에 도착했던 역사는 조선이 건국해서 조선이 무너질 직전까지 계속됐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제주의 말은 그후 육지에 나오지 않았을까. 국가에 헌납한다는 공출마의 이름으로 건너온 것은 사라졌겠지만 개인간의 거래는 근세까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초반까지 호남 서남부지역의 큰 어물센터였던 강진읍 남포마을은 제주에서 사온 조랑말이 상인들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말을 살 때는 여러사람이 돈을 내서 돛배를 대절한 다음 5~6마리씩을 제주에서 구입해 왔다. 말의 가격은 굉장히 비싸서 보통 한 마리에 논 3~4마지기 값을 지불해야 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말이 끄는 달구지가 일상적인 것이여서 강진읍에는 말발굽을 만드는 대장간이 다섯 군데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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