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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인물사] 현구 김현구 시인(1904 ~ 1950) - <끝>“내 무덤에 오실때는 꽃 한송이만 심어주소”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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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19  1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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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무덤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마라고 당부한 시인
1970년 사후 20년만에 첫 시집, 82편 시 실어
1992년에는 군립도서관 앞에 시비 건립
아담했던 한평생, 그 체취는 지금도 시속에 흐른다

   
1970년 현구선생의 사후 20년만에 첫 시집을 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는 모습이다. 단상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현구선생의 친구였던 차부진 선생이다.  <사진=현구 김현구 전집>
세 차례의 시집 출판 기회를 놓친 현구선생은 강진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1950년, 6.25를 맞았고 그해 10월 3일 오후 지금의 강진고등학교 자리 공동묘지 부근에서 좌익에 의해 46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고 만다.<현구선생의 6.25 당시 죽음에 이른 기록은 강진인물사 1, 2편을 통해 서술했음> 현구선생은 자신의 죽음을 마치 예상이나 했다는듯이 말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내 무덤에 오려거든/ 조용히 혼자 오소서// 날새면 찾아와서/ 나와두리 노는 산새// 여러사람 지껄이면/ 아여놀라 나라가리// 내 무덤에 오시거든/ 눈물일랑 짓지마소// 쓸쓸한 산골속에/ 혼자누어 한가한 몸// 한세상 슬픈생각/ 마음도 지긋하이// 내 무덤에 오실때는/ 아모것도 들지말고// 뵌손쥐고 오신길에/ 볼이없이 외롭게핀// 꽃한송이 오마다가/ 무덤우에 심어주소.

이 시는 훗날 자신의 무덤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일관되게 마지막 당부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시집도 비매품으로 발간하려한 시인이였으니 자신의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이야 말로 그저 아무것도 없는 마음으로 와 주길 바랬을 것이다.

눈물도 흘리지 말고, 아무것도 들지말고, 조용히 혼자서 왔다가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나마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희망은 그저 ‘외롭게 핀 꽃한송이 무덤위에 심어주라’는 것이였으니 그도 이 세상에 끈질긴 애정과 미련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3일 현구의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하기사 그렇게 역동적이고 활발한 삶을 살던 영랑도 현구보다 12일 앞선 9월 19일 서울에서 포탄을 맞고 죽었으니 그 시대의 비극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후로 오랫동안 현구도 영랑도 잊혀진 인물이 됐다. 영랑은 해방후 우익활동을 벌이다가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한 후 서울로 올라가 6.25란 동족상잔의 와중에 죽음을 맞았다.

현구도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좌익의 손에 의해 허망한 죽임을 당했다. 그 당시의 죽음이 그랬지만, 너무나 원통하고 허망한 것이였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당장 자신들의 목에 풀칠을 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렇게 50년대와 60년대가 갔다. 그때만 해도 6.25의 상처, 좌우익 갈등의 아픔이 가실때가 아니였다. 당시 상황을 들춰내고, 그때 묻혔던 아픔을 되살리는 것은 일종의 금기사항이였다. 현구도 영랑도 애써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져야 할 사람들일 뿐이였다.

그러다가 70년대가 됐다. 지역사회에 다시 문화가 꽃피고 역사를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청자도 다산도 그때부터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고, 지역의 각종 문화재들이 다시 관심받기 시작한게 70년대 들어서였다. 

지역사회에서 영랑선생에 비해 덜 알려진 현구시인을 조명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70년대 초반은 차부진선생과 김현장선생등이 활발한 문화활동을 벌일 때였다. 그래서 탄생한게 김현구사업회였다. 현구선생의 유족들과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기념사업회에 참여했다. 기념사업회 회장은 당시 성요셉여고 선생님이였던 임상호 선생이 맡았다.

1970년 5월 5일 역사적인 ‘김현구 시집’ 초판이 나왔다. 현구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시집에는 모두 82편의 시가 6부로 나뉘어 실렸다.

12편은 ‘시문학’을 비롯한 문예지에 발표한 것들이였고, 나머지는 죽기전에 남긴 시들이였다. 시집의 앞쪽에는 그가 1941년 2월에 시집을 내기 위해 적은 서문이 그대로 들어갔다. 유족들은 현구선생의 바램대로 사후 20년만에 나온 시집을 비매품 발행했다.
 
이후 지역사회에서도 현구선생에 관심들이 많이 늘어났다. 1992년에는 강진군립도서관 앞에 시비도 세워졌다. 그후에도 지역에서 크고 작은 현구선생 기념행사들이 열렸다. 아담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현구시인의 체취는 지금도 그의 시속에 조용히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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