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후 시작적 발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겸손했던 현구, 첫 시집 비매품으로 출간 계획
생전에 모두 세차례 출판기회
결국 책내지 못하고 6.25 맞아

북한의 대동강에 있는 부벽루를 찾았을때 현구(맨 오른쪽)의 모습이다. <사진=현구 김현구 전집>
현구선생은 생전에 시집을 낼 기회가 세 번 정도 있었다. 한번은 1936년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에 이어 현구시집을 내기로 하고 영랑이 원고를 가져갔으나 다음해 용아 선생의 죽음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시문학사는 1935년 10월 정지용 시집을 발간한데 이어 1935년 11월 영랑시집을 발간했다.
 
그 다음 순서가 현구시집이였다. 그러나 그의 시집 발간을 준비했던 기간 중 용아 선생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구는 자신의 시집을 1930년도 중반에 발간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현구로서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셈이였다. 김선태 교수는 이를 놓고 ‘바로 이점 때문에 영랑등과는 달리 그의 시가 당시 평가의 대상에서 벗어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현구 김현구 전집 190페이지 참조>

그의 두 번째 시집발간 기회는 1941년 찾아왔다. 광명인쇄소라는 곳에서 시집을 내려 했는데, 이때 현구는 시집 발간에 상당히 의욕적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가 남긴 시집 서문은 지금도 유명한 문구로 전해 온다. 1941년 2월 5일 적은 것으로 돼 있는 서문은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자신의 진술서이자 일종의 고백서라고 할 정도로 그의 정신적 세계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저 혼자 수줍어 십여년간을 내 책상 설합속에서 먼지 덮힌 체 수절하던 이런 졸고들을 지금 새삼스레 모아 책을 만든다는 것은 세인의 고소(苦笑)를 살 뿐 시대 착오의 유모어가 있을 지언정 아무런 존재의의가 없을 줄 안다. 그러나 나로서는 한때의 잊지못할 귀여운 기념물이며 또한 그 평생을 슬품속에 마치신 망모의 강볏은 영전에 자식의 값적은 선문을 바치고자 몇권의 인쇄제본을 광명인쇄공사에 수탁한 김에 면식은 없으나마 기왕 그 고명을 살핀 선배 제위와 지우 몇분께도 이 부끄러운 선물에 가납의 영광을 얻고자 한 바이다’

서문의 구절구절이 겸손으로 똘똘 뭉쳐있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문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서문은 계속된다.

원고는 현구선생이 1941년 시집을 내기 위해 직접 적은 시집의 머릿말이다. 현구는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비매품 여부를 놓고 출판사와 줄다리기를 하다 시집을 내지 못했다. <사진=현구 김현구 전집>
‘내 이 시집을 일부러 비매품으로 한 것은 예술적 양심의 발로에서 자기작품의 상품화 함을 치욕으로나 여기는 그런 편협한 성격의 소이가 아니라 금후의 나로서는 이 이상의 시작적 발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또 본래가 이 시집은 가치에 있어서 감히 저열하다함을 내 자신의 겸양에 의한 과소평가가 아님을 확인함에 널리 세상에 읽히어서 유익됨이 없을 것을 자각하고 사본으로나 하여 내 혼자 간직하여 두려던 것으로서 시단적 책임과 비평을 기피하려는데 있음을 변명삼아 부연하여 두고 혹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이점 서량(사정을 살피어 용서함)하심을 바란다’

이 겸양하기 짝이 없는 시인은 자신의 시집이 돈을 받고 팔리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은 일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출판사라는 것은 책을 내서 그것을 시중에 팔아서 이익을 얻는 업체이다. 새 시집을 내기로 작정하고, 출판사에 원고를 맡기면서 비매품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느니 출판사가 어떤 마음으로 책 발간을 준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아마 현구는 출판사에 얼마간의 비용을 스스로 지불하고, 책을 비매품으로 발간한 다음 서문에 적은 대로 ‘사본으로나 내 혼자 간직하여 두려던 것’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역시 현구가 비매품 발간을 고집하면서 출판사 측과 타협을 보지 못하고 끝내 출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당시 공보처 출판국장이던 영랑 김윤식 선생의 주선으로 시집을 내기로 하고 원고를 정리해 보냈으나 불행히도 마침 발발한 6.25 전쟁으로 영랑이 사망함에 따라 그 원고 마저 분실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현구선생은 아들 원배씨에게 원고지에 시를 정리해서 보내고 있는게 있었다. 그 시편이 60여편에 달했다. 훗날 이 작품들은 현구의 유고시집을 내는데 큰 자료가 됐다.

이런 저런 와중에 현구는 다섯 아이를 얻는다. 1936년 시문학사에서 시집발간이 좌절된 다음해인 1939년 2남 문배씨가 출생했고, 이어 준배, 명희, 경희, 6녀인 광희씨등이 태어났다. 광희씨가 태어난게 6.25 직전인 1949년이었다.

이제 현구선생은 3남4녀의 가장으로서 큰 가족을 책임지는 세월이였고, 강진군청 공무원 생활은 가족 부양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직장이였다. 그에게 삶은 시인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는게 최대 목적이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6.25가 터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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