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좋아 했던 현구‘나는 외로운 갈매기’

영랑선생 “제발 그 쥐어 뜯는 버리장머리 좀 버리랑께”
차부진 선생 “영랑과 현구는 나뉘어 질 수 없는 연분”
1927년 25세때 결혼 슬하에 3남6녀 둬
내성적 성격이였지만 가족사랑 애틋

1992년 강진군립도서관앞에 세워진 현구선생의 시비이다. ‘님이여 강물이 몸시도 퍼렀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현구선생은 막걸리를 좋아 했다고 한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한 그였지만 먹걸리를 몇잔 들이키면 예외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멋쩍게 웃어넘기는 그였지만 막걸리 주전자를 놔두고 친구 몇사람과 마주 앉기만 하면 저절로 말이 흘러 나왔다.

술이 취하거나 취흥이 오르면 언제나 “나는 바다에 뜬 갈매기 외로운 갈매기”란 말을 입버릇 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그쯤 되면 현구선생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은 하나 둘 자리를 옮기기 일쑤였다.

그 이유는 ‘나는 바다에 뜬 갈매기 외로운 갈매기’라고 나오기 시작하면 그 뒤에 오는 것이 반드시 눈물이고, 옆 친구를 훔쳐잡고 뜯어대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구는 이 때문에 영랑과 종종 말다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술만 먹으면 옆사람을 뜯어대는 버릇을 보고 영랑이 현구에게 “그 쥐어 뜯는 버리장머리 좀 버리랑께”하며 핀잔을 주었고, 그 말을 되받아 현구가 한마디 더 하면 말다툼이 되곤 했다.<현구시집. 차부진 선생의 글 참조>

차부진 선생은 “영랑과 현구는 다 같이 활짝 핀 모란꽃과 창해의 흰물결을 지치도록 스치며 나르는 외로운 갈매기였으며 두 사람은 나뉘어 질 수 없는 연분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현구선생은 1927년 25세의 늦으막한 나이에 해남군 북평면 남양 홍씨 홍충덕과 결혼한다. 슬하에 원배, 은희, 금희, 정희, 문배, 준배, 명희, 경희, 광희등 3남6녀를 두었다.

당시에야 이렇듯 많은 자녀를 둔게 일반적인 일이였지만 유복한 집안이 아닌 상황에서 그렇게 가솔을 많이 거느린 것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겼던 시인 현구선생에게 또 하나의 부담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 현구시집을 그의 사후 20년만에 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임상호 선생은 “그는 세속의 명리를 초개같이 여기는 한 마리 백로로서 살고자 했으나 가솔들을 여럿 거느린 가장인 그를 가난은 몹시도 괴롭혔으며 늘 그를 비관과 한탄에 젖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호방한 삶을 누리는 영랑을 부러워하면서도 영랑이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과 해방 후 적극적으로 현실적인 명리에 관심을 주는 것을 적잖이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김선태의 논문 현구시 연구. 13페이지 참조>

한편으로 그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효성이 지극하고 자식들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해서는 자상한 사람이였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1941년 적은 ‘현구시집’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현구시집’을 발간하기 위해 서문까지 적은 적극성을 보였으나 그의 계획은 한참 미뤄졌다. 대신 그가 당시에 적은 시집 서문은 그의 사상과 취향이 함축된 향기를 드러낸다. 그는 이 서문에서 ‘나로서는 한때의 잊지못할 기념물이며 또 한 그 평생을 슬픔속에 마치신 망모의 가엾는 영전에 자식의 값적은 선물을 바치고자...’ 시집을 만든다고 했다.

그의 가정생활은 훗날 자식들의 증언을 통해 잘 알려졌다. 장남 원배씨가 1970년 아버지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적은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손수 쓰시고 책을 매어 객지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주신 아버님. 또 좋은 작품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해설을 해주시던 다정하신 아버님. 이제는 영영 돌아 올 수 없는...’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현구선생은 잠깐동안의 서울유학과 일본 유학등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겼으며, 막걸리를 마시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따뜻한 가족생활과 내적인 명상등을 통해 나름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시작활동을 에 대해서 알아보자. 현구의 공식적인 시작활동은 1930년 5월 <시문학 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를 비롯한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는 ‘시문학’ 창단멤버로 시문학1호에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등 13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서 시단에 얼굴을 내민 영랑보다 두달 후에 등단한 셈이며, 등단과 함께 현구는 시문학파의 일원으로 본격 가담하게 된다.<김선태 논문 참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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