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명 / 완도금일고등학교 교사

간절한 구도 염원이 낳은 예술
 
무위사 극락보전의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으로 닫집 모양의 보개천정(寶蓋天井)을 세우고 그 아래 불단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셨다.

아미타삼존상은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있으며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전형적인 아미타삼존상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각각 바깥쪽 다리를 늘어뜨린 자세를 취했다.

이 아미타삼존상의 뒤편 벽에 그려진 아미타삼존도와 거의 같은 양식으로 불전과 불상, 그리고 후불 벽화가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통 법당을 지을 때 먼저 부처를 모시고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 목재나 벽채의 수분이 빠진 후에 벽화나 단청을 올리는 통례로 보아 그림보다 약간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불상 뒤의 아미타삼존도는 부드러운 붉은색과 녹색 계통을 주조로 한 채색, 화려하고 섬세한 묘사 등이 고려 불화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두 협시보살의 키가 부처의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쪽 좌우에 세 명씩,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진 구도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는 엄격한 상하 구도의 고려 불화와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16세기 이후의 불화와도 다른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이다. 한편, 광배는 원형도 아니고 배(舟) 모양도 아닌 어깨 위가 잘룩한 키 모양의 이루고 있다.

벽화의 아랫부분에 적힌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그림은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 등 여러 사람의 시주로 대선사 혜련 등이 그렸고 성종 7년(1476)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화기(畵記)가 분명하지만 그림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극락보전을 완성한 후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던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을 한 노승이 절을 찾아왔다. 그는 법당에 벽화를 그리겠다고 하더니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노승은 법당에 들어가더니 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음식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스님은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다 그린 후 막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미타삼존도 뒷면에 또 하나의 벽화가 있다. 역시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월관음도이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장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연잎 모양의 대좌 위에 서서 왼쪽 아래쪽에 승복을 입은 늙은 비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늙은 비구승의 표정에는 구도를 갈망하는 듯한 간절함이 느껴진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주변에는 물결이 표현되어 바다 위에 떠 있음을 나타낸다. 흰 너울과 옷자락이 칼칼하면서도 율동감 있게 휘날린다.

원래 극락보전의 내부에는 크고 작은 공간들마다 아마타삼존도와 수월관음도 외에도 설법도와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공양도, 비천도, 보살도 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아미타 사상이라는 통일된 주제로 장식된 벽화의 보고였으나 현재는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도와 수월관음도 외에는 모두 통째로 들어내 벽화 보존각을 거쳐 성보박불관에 전시되어 있다. 극락보전 내부에 지금도 남아있는 좌우측벽의 아미타래영도와 설법도는 필사본이라 한다.

보물 제1313호로 지정되었던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불화는 2009년 9월 1일 ‘아미타여래삼존벽화’로 이름이 바뀌어 송광사의 ‘화엄경변상도’와 함께 국보 313호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무위사는 국보를 2점이나 보유한 사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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