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학 접고 귀국… 고향에서 습작생활 계속

1920년대 강진은 문예중흥기, 각종 강연회 풍성
조용한 시인 현구는 여전히‘고독을 즐기는 남자’
현구선생, 영랑·효암선생들과 문예지‘청구’발간
친구근무하는 강진읍사무소에서 등사해 작품 돌려봐

현구선생이 보은산 중턱에서 자주 내려다 봤던 강진읍의 풍경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금사봉과 강진만등은 변함없는 모습이다. <사진= 강진시문학파기념관 제공>
현구 선생은 1923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그리 길지 않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당시 강진에서는 일본에 유학을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향학열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능력이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현구 선생처럼 어려운 처지에 일본에 건너가서 학업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920년 7월 9일 강진에서는 강진군청년회 주관으로 의미있는 음악회 하나가 열린다. 일본 동경에서 어렵게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강진출신 학생들을 돕기 위해 ‘재동경강진고학생 구제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강진군청년회는 수익금을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의 생활정도에 따라 차등배분해서 현지로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22년 7월 31일 기사 참조>  

현구가 가난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간게 1923년쯤 되니까 그때까지도 매년 일본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지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구는 어쩔 수 없이 귀국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강진으로 돌아 온 현구는 이때부터 고향에 묻혀 많은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구강포의 수려한 풍경에 심취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공식적인 습작활동은 이때부터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1920년대들어 강진은 그야말로 문예 중흥기였다. 기미년 독립운동을 분기점으로 강진에는 향학열과 독서열풍이 불고 있었다. 영랑 김윤식 선생이 일본 동경에서 청산학원 유학을 마치고 귀향했고, 현구도 고향에 정착하고 있었다. 차부진 선생은 지역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현구와 영랑, 차부진 선생등이 ‘청구’문학모임을 결성하고 문학동인지를 발간한 것도 이때의 일이였다.

현구는 1921년경부터 약 4개월간 청구라는 문학모임을 결성해 마을 뒷산에 모여 시대적 아픔을 문학열로 다스린다. 이들은 당시 차부진 선생의 친구가 근무하는 읍사무소에서 프린터로 작품을 등사해서 돌려보곤 했다고 한다.<김선태의 논문 참조> 여기서 말하는 마을 뒷산이란 보은산이였을 것이고, 그들이 모인 장소는 아마도 비둘기 바위나 기차바위가 아니였을까 추측해 본다.

현구선생의 육필원고이다. <사진= 강진시문학파기념관 제공>
이때부터 영랑의 경우 이미 4행시라는 것을 써서 보여주곤 했다는 증언을 감안한다면 영랑이나 현구의 습작활동은 등단년도보다 훨씬 이전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강진에서는 풍성한 문학경연회가 많이 열렸다.
 
낭산 김준연 선생(영암 출신.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국회의원등 역임)이 독일 유학에서 귀국하자 그의 학술강연회가 강진에서 처음 열렸고 이어 육당 최남선 선생, 춘원 이광수 선생의 강연도 강진에서 열렸다.

1922년에는 역시 강진청년회의 주관으로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의 작곡자이기도 한 홍난파 선생이 강진에서 강연을 했고,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이 강진에서 공연도 했다. 또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이 독창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강진의 청년들이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세익스피어 문집과 루소의 자유주의 사상,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도스토에프스키의 혁명적 사상, 괴테의 문학사상등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작고한 차부진 선생은 ‘현구시집’에 실은 ‘내가 아는 현구시인’이란 글을 통해 “이 시절이야말로 이 세대에 우리 강진만이 간직한 황금시절이였다고 나는 이를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도 그럴것이 인근 지방들이 이를 몹시도 부러워 했던 것이 사실이다”고 회고했다.

그런 강연을 듣고, 공연을 보면서 현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여전히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였고, 세속의 서러움을 혼자 걸머지고 울고 웃는 사람, 유달리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도 쉽사리 남에게 정을 주지 않은 사람(차부진 선생 글 참조)이였다. 그는 또한 고집이 유달리 세면서도 막걸리 자리에서는 폭소를 자아내는 사람이였다. 그의 막걸리 일화가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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