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출신 김억추장군 사용설 꾸준히 존재, 수 많은 기록 설명… 일부 학자들 부정

“12척의 배로 130여척의 외선을 침몰시킨 것은 어떤 외부적인 힘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노기욱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실제로 철쇄모양을 수거해서 해남군청에 가져다 준 적이 있습니다”<김재옥 1980년 당시 해남경찰서 보안과장>

지난 9일 오후 2015년 명량대첩축제가 열린 해남 우수영의 유스호스텔 강당. 명량대첩의 정신과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학술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쟁점중의 하나는 명량대첩에서 철쇄가 사용됐느냐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였다. 철쇄설은 명량해협 양편에 말뚝 혹은 기둥을 박아 철쇄를 설치해 놓고 일본 전선이 지나갈 때 잡아당겨 일본 전선을 뒤집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 철쇄설은 있었던 것으로 기정사실화 돼 있었다. 오래전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나왔고 KBS의 역사 스페셜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철쇄설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7월 개봉돼 대대적인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에서 철쇄설을 인용하지 않았고, 당시 철쇄를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오는 김억추장군을 왜소화하면서 이 문제가 각계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명량대첩축제 당시 철쇄의 사용여부는 강진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고 있는 부분이다. 철쇄를 제작해 사용했던 김억추장군이 강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9일 열린 학술세미나에는 강진과 장흥, 해남등지의 청주김씨 문중회원들이 대거참석하는 관심을 보였다.

명량해전 철쇄설이 등장하는 사료들은 많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1751년에 저술한『택리지(擇里志)』도 그중 하나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므로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러 철쇄를 돌맥이 다리 위에 가로 걸고 적을 기다렸다. 왜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철쇄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또 다른 사료는 명량해전에 전라 우수사로 참전했던 현무공 김억추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현무공 실기’과 1799년 편찬된 ‘호남절의록’에도 기록이 있다.

‘정유재란 8월 18일에는 병선과 장작귀선을 한곳에 집결시키라는 글을 이순신이 보내오고 김억추는 밤낮으로 전함을 만들고 물속에는 쇠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쇠줄이 너무나 무거워서 움직이기 어려웠으나 김억추는 간만의 차이에 따라 높낮이를 알맞게 조절하였다. 왜선을 침몰시키는 승리로 이끄니 이순신은 영남을 보전하려면 호남이 완전해야 하고 호남을 잘 지키는 것은 김억추의 꾀에 매달려 있다고 나라에 보고하였다.’

해남현지에도 철쇄설이 등장한다.
‘충무공께서는 철쇄를 수중에 횡절하였는데... 양변 바위위에는 철삭을 박았던 구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며, 사람들은 모두 이 곳을 가리켜 충무공이 철삭을 설치해서 왜적을 몰살시킨 곳이라고 불렀다’

이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철쇄설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원균이 7월 칠천량에서 대패한 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지만, 명량해전까지 불과 2개월 정도의 시간 밖에 없었고, 『난중일기』에 기록된 명량해전 당일의 일기에도 철쇄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노기욱 연구원은 이날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실적으로 볼 때 12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선을 물리친다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장군의 리더십으로도 쉬운일이 아니다. 무언가 전술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어려운 일이다. 철쇄설이 완전히 부정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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