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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인물사]현구 김현구 시인(1904 ~ 1950) - <5>유복했던 집안, 한일합병 거치면서 급격히 쇠락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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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08  10: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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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1월, 5남 4녀중 셋째 아들로 출생
형제들, 의협심 강하고 예술적 재능 뛰어나

   
금강산 비로봉 정상에 오른 현구(맨 위)<사진 제공=강진시문학파기념관>
 
현구시인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사후 20년만인 1970년에야 그의 유고시집인 ‘현구시집’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어두운 터널속에 있었는지 짐작할 따름이다.

‘현구시집’은 임상호 전 강진신협이사장등이 주도해서 어렵게 내놓은 책이였다. 그러다가 현구시인이 집중 조명된 것은 1995년 김선태 현재 목포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김현구 시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부터였고,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지역내에서 현구시인을 알기 위한 다양한 행사(2003년 ‘30년대 시문학사의 샛별 김현구시인의 발자취전’등)가 마련돼 그가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현구선생의 면면을 가장 잘 전해준 글은 1970년 ‘현구시집’을 발간할 당시 ‘내가 아는 현구시인’이란 글을 쓴 효암 차부진 선생의 글이다.  

이 글은 주로 1970년 발행된 현구시집, 현구시집속에 있는 차부진 선생의 글, 1995년 김선태 교수의 논문등을 기본적으로 참조해서 기술하기로 한다.

현구는 1904년 11월 30일 영랑보다 한해 늦게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에서 아버지 김해김씨 노식과 어머니 김해김씨 광자 사이의 5남4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현구의 부모는 같은 김해김씨 끼리 혼인을 하였는데, 영랑 김윤식의 경우도 첫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모두 김해김씨였다. 그러니까 현구는 같은 김해김씨인 영랑과는 집안의 먼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현구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까지는 벼슬을 이어올 만큼의 지방의 명문 관료집안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500석 지주였던 영랑의 집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비교적 풍족한 편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병을 거치면서 어떤 송사에 휘말려 급격하게 가산이 기울기 시작해 이후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김선태 교수 논문 참조)

이같은 사실은 강진읍 서성리 일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한 주민은 “6.25 당시 현구시인의 집 형편은 아주 가난한 집은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상황도 아니였다. 아주 서민적인 가정이였다”고 말했다. 현구는 6.25때 군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1900년들어 쇠락한 살림살이가 6.25때까지도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차부진 선생은 ‘현구가 태어난 가정은 당대 지방의 명문이요, 세도가 당당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풍족한 가정이였으나 현구가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한 1905년 소위 을사조약이라는 민족의 치욕적 조약이 성립되어 우리 주권이 사실상 일본인의 통감부에 의해 박탈당하자 우리나라는 참극을 맞이했고, 이러한 지경은 현구의 가정은 물론 지방의 중산계급 즉 관료에서 생활을 영위하던 계층의 전반적인 현상이었음을 말할수 있다’고 적었다.(김현구 시집 120페이지 참조>

현구의 형제들은 모두가 의협심이 강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장남인 현봉씨는 당시 강진의 독립운동가 26인중의 한사람이였고, 2남 현상씨는 영암에서 교직생활을 거쳐 목포에서 한독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또 현구 선생에 이어 쌍둥이인 4남과 5남은 각각 음악과 회화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김선태 교수 논문 참조)

강진문사고전연구소가 지난 2011년에 발행한 ‘강진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장남 현봉씨와 함께 2남인 현상씨도 강진의 4.4 만세운동에 관여 했다는 것이 나온다. 책에 따르면 현봉씨는 22세이던 1919년 4.4 만세운동 1차 거사를 모의한 혐의로 김안식, 차래진, 이기성등과 체포됐다.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또 차남인 현상씨(당시 20세)는 1919년 3월 20일, 4.4. 만세운동을 모의한 혐의로 영랑 김윤식 선생등과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현구는 어릴적에 김영랑 등과 함께 지금의 군청뒷편 관서제(官書齊)에 다니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관서제는 조선말 이종서란 사람이 지은 일종의 한문학당이였으며, 일본의 우리나라 강제합병 이후 사립 금릉학교로 개칭돼 이 고장의 인재를 길러내기도 한 곳이다. 현구시인은 이어 1911년 강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한 뒤 재입학해서 강진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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