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생생한 현장 신전 수양마을…<동아일보 1967년 9월 29일자> 사회면 특집 르포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수양마을 한 초가집의 모습이다. 사진설명이 살길을 찾아 떠나버린 이농민의 빈집이라고 적혀 있다.
강진은 68한해에 앞서 67년도에도 대 가뭄을 겪고 있었다. 동아일보 1967년 9월 29일자에는 가뭄으로 마을이 초토화된 도암면 수양리(지금의 신전면 수양리)의 사례를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다. 다음은 기사 요약문이다.

‘한재민들이 땅과 집을 떠나고 있다. 타버린 들판에서 통곡하던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무작정 도시로 도시로 몰려나가고 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수양리. 험준한 주작산아래 자리잡은 이 마을은 아늑하고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물도 좋다고 해서 이름마저 수양리라 했다.

그러나 잔인한 한마가 끝내 마을을 결단내고 말았다. 118호가 오순도순 살던 수양마을은 통곡의 마을이 됐다. 2만8천명의 논과 1만5천평의 밭이 몇집을 빼놓고는 모조리 가뭄을 탔다. 거의 모두가 볏포기 조차 패어보지 못한채 말라 붙어 버렸다.

그래서 지난 9월초부터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살길을 찾아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20~30대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중에는 30. 40대 아주머니도 10. 20대 어린소녀들도 끼어 있었다. 또 나가는 곳도 목포, 광주등 인근도시와 서울이 제일 많은편이다.

놀란 이마을 이장 이희석(37)씨는 마을뒤 덕룡골에 자조근로사업장이 생겼으니 여기서 일하면 먹고산다고 아무리 붙들어도 막무가내였다. 이때 서울에서 정희변 보사무장관이 수양마을을 찾았다. 참혹한 한재와 이농현상을 보고 놀란 정장관이 마을 주민들에게 “정부가 어떻게든 굶지 않도록 해줄테니 제발 농토를 떠나지 말라”고 마을 사람들을 달랬다.

수양마을의 이농현상은 이때부터 뜸해졌다. 봇짐까지 쌌던 사람들이 다시 짐을 풀고 덕룡골자조근로사업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한 장관의 성의와 위로의 말이 사람들을 끝내 붙들어 주진 못했다.

마을사람들이 다시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 지난 23일 현재 마을을 떠난 사람은 윤점석(32)씨등 모두 54명으로 부쩍 늘어났고, 윤보하(50)씨와 오형록(32)씨등 8가구는 아예 온 식구가 모두 마을을 떠나 버렸다.

윤씨는 가족이 8명, 논 1천200평에 밭이 900평이였으며 오씨는 가족 4명에 논 900평, 밭 500평이었는데 이번 가뭄에 모조리 타버렸다. 마을사람들은 윤씨와 오씨집에서 떠나기전날 밤 울음소리가 들려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아침에 보니 세간도 그대로 둔채 문에 빗장을 쳐놓곤 떠나고 없더라고 했다.

이장 이씨는 윤씨와 오씨가 이장인 자기에게 조차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 버려 처음에는 섭섭했으나 뒤에 가만 생각해보니 말없이 떠난 그들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싶어 가슴이 아파오더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이 자꾸만 떠나가자 수양마을 주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장 이씨는 우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떠나간 사람들의 주소를 가능한한 모아 ‘돌아오기 운동’을 벌이는 한편 떠난 사람들의 집주위를 마을 사람들이 매일밤 교대로 돌아가며 두고간 세간들을 지켜주고 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