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旱害) 피해 고향 떠난 사람들‘고생 또 고생’

단돈 몇백원 쥐고 제주도로‘생활 막막’
서울서 좌판 실패하고 자살한 사람도

가뭄은 1980년대에도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자연재해였다. 1980년대 후반은 양수기 시설도 태부족이였다. 사진은 1981년 가뭄때 충북 보은 지역에서 야간에 횟불을 들고 물을 품는 모습이다. <사진= 81, 82 한해극복지. 농수산부 발행 참조>
68년 대 한해는 8월 15일 오후부터 전남지방에 내린 비로 조금씩 해갈되기 시작했다. 오랜가뭄 끝에 폭우주의보와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강진을 비롯한 전남지역에 골고루 70~100㎜의 비가 내렸다. 단비란 표현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반가운 비였다. 그러나 강진을 비롯한 전남지역 농촌은 이미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뒤였다.

사람들은 먹고 살 곳을 찾아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동아일보 1968년 8월 14일자 사회면에는 안타까운 강진사람의 사연이 간단히 실려 있다. 기사의 제목은 ‘이농민 제주도로 몰려, 하루 30명씩 일자리 찾아’이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최근 제주~목포간 정기여객선편에 한해 지구인 호남지방 이농민들이 하루 평균 20~30명씩 이곳 제주도로 일거리를 찾아 몰려들고 있다. 몇백원의 노자만을 가지고 고향을 떠난 이들 이농민들은 제주도에 가면 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속에 봇짐을 꾸린다는 것인데 전남 강진에서 왔다는 김종구(50)씨는 “일터를 마련하면 가족까지 데려올 계획이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제주시 사회과에서 경영하는 ‘사랑의 집’ 천막에서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한해지역, 그러니까 가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인 강진의 김종구란 사람이 홀홀단신 제주도로 건너가 일자리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제주시에서 운영하는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동아일보 10월 2일자에는 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역시 한해지구에서 상경에 3개월 정도 노점상을 하다 실패한 윤영현(27)씨에 대한 이야기다. 윤씨 고향은 강진군 강진읍 성전동 889번지였다.

김씨는 68년 한해로 농사를 망치고 그해 6월초 부모와 함께 무작정 상경해 날품팔이로 전전하다가 일수돈 일만오천원을 빌려 박람회장 부근에 노점상을 하다가 실패하자 이를 비관해 자살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추석을 앞두고 부모님에게 따뜻한 밥한끼도 대접할 수 없다’ 그가 사는 곳은 서울 약수동이였는데 음독을 해서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음독한 지 사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68한해로 농사를 망친 윤영현씨가 가족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서 노점상을 하다가 음독을 했다는 기사다. 65년부터 계속된 가뭄은 68년 들어 정점을 찍으며 이렇듯 강진 사람들을 제주로, 서울로 내몰았다. 그것도 돈한푼 없이 달랑 몸만가지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여서 그들은 제주나 서울 외곽에서 정착하기까지 그야말로 처참한 밑바닥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 68년 8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강진교육청이 초등학교 교사들을 총동원해 한해 피해를 조사한 결과 그해 가뭄피해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강진의 학생들이 중학생이 240명, 고등학생 122명, 전문교 9명, 대학교 23명등 총 394명에 달했다. 이는 인근 장흥군의 중퇴자가 167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강진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였다.

타지로 떠난 사람들은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들의 초창기 생활은 비참했다. 오랫동안 재제주강진향우회와 호남향우회를 이끌었던 강진출신 문인식(제주특별자치도 조천읍 신천마을) 회장은 전남 사람들이 제주도에 들어가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는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전남 사람들이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던 60년대 후반, 제주는 섬이라서 장례문화가 육지보다 더 시끌벅적했다.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상여를 매고 장지까지 따라 갔다. 그런데 매장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주민들 중에 꼭 서너명이 쓰려졌다. 그들은 대부분 육지에서 들어온 전남 사람들이었다.

“평소에 고기나 좋은 음식을 구경도 못하다가 장례식장에서는 무엇이든 실컷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전남사람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탈이 생겨 산을 내려오다 꼭 쓰러졌어요. 그러면 조랑말을 끄는 구루마가 이들을 실어 산길을 내려 오곤 했죠. 그렇게 생활이 참담했습니다”

 또 섬사람들은 전남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외부인들로부터 고통도 겪고, 또 나름대로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섬에 외지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와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토박이들에게 어쨌든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도민들과 육지에서 들어간 주민들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는게 공통된 설명이다. 대부분 3D 업종에서 종사하던 호남사람들은 생활전선에서 이런저런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한 향우회원은 폭행을 당해 파출소에 가도 호남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 때가 있었다고 했다. 제주사람들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향우들이 먼저 열심히 하자는 움직임도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어 제주도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를 잡은 문인식 강진향우회 고문은 향우회 회원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회원 중의 한 명이다.
 
문고문은 육지사람들과 제주도민들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자 이래서는 안된다 싶었다. 그래서 70년대 중반 육지사람들로 구성된 육인회(陸人會)를 처음으로 조직했다. 자신이 살고 있던 제주시 조천읍에 처음으로 호남향우회를 출범시켰다. 회원을 계도하기 위해서였다. 육인회와 호남향우회 사람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이 자리에서는 문고문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가 남들로부터 칭찬은 받지 못하더라도 욕을 먹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문 고문이 지난 1994년 호남향우회 소식지인 ‘월간 향우’에 기고한 글에는 이같은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문고문은 글에서 ‘우리는 여기 제주에 뿌리를 내려 제2의 삶의 터로 다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특히 우리 호남인 여러분께 바른 삶, 의연한 행동으로 우리 2세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맘 간절합니다. 허물은 서로 감싸주고 잘못은 깨우쳐 주면서 우리가 떠난 후에도 오염되고 지저분한 모습만은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호남인들은 참는 버릇을 생활화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어떤 행사로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다함께 자각합시다’라고 호소했다.  

==================================================================================

68한해때도 책 놓지 않았던 강진사람들

강진읍 장전마을‘청몽마을문고’전국대상 수상

강진읍 장전마을의 1970년대 중반 모습이다.
우리 강진사람들은 68년 그 한해가 들었던 시절 책을 읽고 가마니를 짜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해 12월 강진군은 전국마을문고본부가 주최한 대회에서 강진읍 송전리 장전마을 청몽마을문고가 대상인 마을문고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안았다. 당시에는 전국에 마을문고가 1만2천2개가 있을 때였다. 그중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것이였다.

<동아일보> 68년 12월 12일자 기사에 청몽마을문고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청몽마을문고는 65년 8월에 설립된 마을단위 문고로 618권의 정서와 회원 20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철따라 모내기 가마니짜기등으로 도서구입비를 충당했으며, 염소와 닭등 가축을 공동으로 사육하면서 매월 평균 3천원어치의 도서를 구입했다.

또 회원들은 마을 유지들의 밭을 빌러 시범농장을 운영했고, 농한기에는 마을주민들에게 야간교육도 실시했다. 또 회원들이 독후감쓰기 운동을 벌여 독서운동을 효율적으로 끌고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