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구선생의 죽음, 허망하고 슬픈 강진의 역사

강진읍 서성리에 있는 현구선생의 생가. 강진군이 복원사업을 위해 매입한 상태다.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 우연한 일로 죽임당하기 일쑤
한이 한을 낳아 엉뚱한 사람들 피해… 그 위에 현구가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의 인물사를 정리하다 보면 그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게 불가피한 일이지만 현구 선생의 경우 그 글이 길어질 것 같다.

6.25 당시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할 당시 벌어진 현구의 죽음은 당시 강진사회에서 전개된 좌익과 우익의 허망하고 슬픈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구선생의 인물사 1편이 나간 후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들을 많이 주셨다. 현구선생이 죽음을 당한지 올해로 65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강진읍에서 8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현구가 죽음 직전의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 본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설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이중 박종상 전 강진문화원장(현 수성당장)의 설명은 기존에 공식적인 기록들과 사뭇 다를 뿐아니라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이여서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무엇보다 현구 시인의 죽음뒤에 있었던 강진의 팽팽했던 좌우익의 대립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례이기도 하다.

현구 선생의 일대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6.25 당시인 1950년 7월 말 강진읍으로 돌아가 보자. 강진읍이 8월 1일 인민군에 의해 점령됐으니까 꼭 일주일 정도 전의 일이였다. 그해 여름은 더웠다. 요즘에도 7월말이면 무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린다.

거침없이 남하를 계속하던 인민군은 7월 20일 이미 영암읍을 점령하고 있었다. 강진에는 이미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인민군이 몇일후에 강진에 온다느니, 인민군이 오면 누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등 매일 공포스런 소문이 확산됐다.

7월 27일에는 강진 관내 각 기관장들이 참여하는 협의회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강진읍 덕남항에 배 3척을 준비해서 우선 우익계인 민주진영인사들을 완도의 고금도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했다.
차종채씨를 비롯한 강진의 갑부들도 군동 백금포에서 큰 배를 타고 청산도를 거쳐 거문도로 피란을 떠났다<강진군정 50년사 참조>.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민간인들에게 잘 알려질리는 없었다. 입소문이 최고일 뿐이였다. 그때 강진읍의 어느 장소에서 10대 후반의 남자아이 네명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이들은 친구사이였다. 한명은 박창환이라고 해서 당시 씨름선수와 역도선수를 했고, 또 한사람은 무당의 아들이였던 김장옥이였고, 또 목포 문태고 2학년이였던 김성준, 또 한명은 아버지가 강진세무서에 다니고 있던 이효묵이란 아이였다.

네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목포문태고에 다니던 김성준이란 아이가 이효묵이란 친구에게 걱정스럽게 한마디를 했다. “애, 인민군이 영암에서 금방 강진으로 온다고 소문이 많던데... 인민군이 오면 너희 아버지가 세무서 다니기 때문에 네 가족이 큰일난다고 사람들이 그라더라...”

읍내에서 도는 소문을 걱정이 되어 친구에게 전해준 말이였다. 이 말을 들은 이효묵이란 친구도 보통 걱정이 되는게 아니였다. 그래서 그날 밤 집에 가서는 아버지에게 “인민군이 오면 우리 가족이 큰일난다고 합디다”라고 역시 걱정반 우려반하면서 말을 했다. 그게 큰 화근이였다. 놀란 아버지가 “누 누가 그러더냐”고 다그쳐 물었다. “서, 성준이가...” 그렇지 않아도 안절부절 하던 효묵이의 가족들은 그 길로 문태고에 다니던 김성준이란 아이를 경찰서에 신고해버렸다.

당시 강진경찰은 월출산 풀치재에서 인민군과 대치하며 수시로 총격전은 벌이고 있을 때였다. 빨갱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그런 신고를 그냥 지나칠 상황이 아니였다. 경찰은 그날밤 신고를 받자 마자 김성준을 체포해 유치장에 가둬 버렸다. 성준의 집은 지금의 서성리 사장나무 주변이였는데 50대 초반의 홀어머니가 있었다.

일찍이 혼자가 된 어머니는 지금의 강진고 아래 강진장애인복지회관 자리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푸성거리를 재배해 이를 시장에 내다 팔며 아이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치고 있던 여자였다. 큰아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좌익운동을 하다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고, 둘째가 성준이였는데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이였다. 막내 성옥이는 해방직후부터 대한청년회에 가담해 우익 활동하고 있었다. 주변사람들이 보기에 어머니는 성준이에게 보든 것을 바치며 살고 있었다.

아들의 죽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밤낮으로 유치장을 찾아다녔다. 집에서 압구재를 넘어 지금의 경찰서를 왔다갔다하며 통곡을 했다.

이를 본 서성리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난리통이라 누구하나 무슨말을 하지 못했다. 강진경찰은 김성준을 체포한 지 사흘 후 강진읍 옥치마을 뒷산으로 데리고 가 총살시켜 버렸다. 경찰은 이어 항의하러 온 김성준의 어머니도 체포했다. 다음날 경찰은 피란길에 올랐다.

김성준의 어머니와 함께 몇몇 수감자들을 도암 해창에서 배에 태웠다. 경찰은 강진만을 지나며 김성준의 어머니를 수장시켜 버렸다. 이때 살아남은 윤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아들과 어머니가 불과 오일 정도 차이를 두고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김성준의 동생 김성옥이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듣고 있었다. 그는 맏형이 지하운동(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후 가족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해방 후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에 가담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나이는 24세에 불과했지만 대한청년단을 열심히 해서 감찰부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이 그렇게 경찰에 의해 죽자 머리가 확 바뀌어 버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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