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시인, 낙하정에서 삶 마감하다

6.25 전쟁중 인민재판 받고 사형당해
영랑 김윤식 사망 후 나흘만의‘참변’

영랑 김윤식 선생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9월 29일 밤 서울의 내과병원에서 절명한다. 며칠전 피난처에서 맞은 포탄 파편이 사망원인이였다. 그때 강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강진은 이미 8월 1일 인민군들이 점령하고 들어와 강진인민위원회가 활동중에 있었다. 8월 4일 그 유명한 강진읍 장날 인민재판이 열려 우익인사였던 차래진 국민회장과 부회장이였던 배영석 강진읍교회 목사, 황호윤 칠량청년단장등 10명이 현장에서 사형에 처해 졌다.

영랑이 서울에서 죽은지 4일 후인 10월 3일 오후 4시. 40대 후반의 사내가 강진읍 서성리 속칭 낙하정이란 곳에서 주민들 앞에 섰다. 인민재판이 열렸다. 한 사내가 소리쳤다. “여러분 이 사람은 강진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주민들로부터 고혈을 빼앗아 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군중속에서 “죽입시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사내는 현장에서 죽창으로 사형을 당했다.<김선기 시문학파기념관장 설명> 허망한 죽음이였다.

그 사내가 바로 46세의 시인 김현구였다. 김현구 시인은 당시 강진읍사무소에서 세금걷는 일을 하고 있었다. 김현구를 낙하정으로 끌고 간 사람은 과거에 그의 집안에서 일을 하던 머슴이였다.(차남 문배씨 증언. 김선태 ‘김현구 시연구’ 12페이지 참조) 강진에서는 인민군이 10월 1일 공식적으로 퇴각한다. 그러나 인민군이 퇴각한 후 인민위원회에 충성했던 주민들은 월출산이나 장흥군 유치면 보림산등으로 도망가면서 수일 동안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10월 3일에는 성전면 월하마을에서 곽치흠 일가 6명이 좌익들에 의해 희생됐고(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참조), 강진읍에서도 그 시기에 현재의 세무서 자리 뒤쪽서 헤아려지지 않은 주민들이 총살을 당했다. 김현구 시인 역시 퇴각하던 좌익들에게 허망한 죽임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이 낳은 걸출한 시인들은 6.25 전쟁당시 불과 나흘 사이로 한명은 서울에서, 한명은 고향 강진에서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은 절친사이였다. 모두 고향이 강진읍이다. 현구는 1904년 서성리 179번지에서 태어났고, 영랑은 이보다 1년 앞선 1903년 강진읍 남성리 211-1번지에서 태어났다. 

고독을 즐겼던 시인‘나는 외로운 갈매기’

영랑선생과 절친사이… 태어난 시기 비슷, 공부도 함께 해
두사람 시를 통한 삶은 확연히 다른 길

현구시인은 1927년 25세라는 늦은 나이로 해남 북평면 남양 홍씨 홍충덕과 결혼해서 슬하에 3남6녀를 두었다. 사진은 신혼 초기의 모습으로 부부가 각각 한명씩 아이를 안고 있다. <사진=강진시문학파기념관 제공>
현구와 영랑은 풍족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공통점과 함께 강진의 향교였던 관서제등에서 학문도 함께 했다. 현구는 1918년 영랑의 첫 부인이 사망하자 ‘M부인에게’ ‘너는 산새처럼 가버리고’라는 3편의 애도시를 영랑에게 써주기도 했다(2008년 ̒현구시와 삶의 재조명̓ 심포지엄 자료. 전남문인협회 이순자 지회장의 글 참조). 그렇게 친하게 살다가 죽은 날도 불과 나흘 차이였으니 두 사람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였다고 표현할만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시인으로서 극명히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영랑은 30년대 활발한 문단활동을 하면서 1930년대를 풍미했으나 현구는 그의 사후 20년 후인 1970년에야 가족들에 의해 유작이 책으로 나왔다. 그는 참 슬픈 시인이였다. 본격적으로 현구시인의 삶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시를 한수 감상하고 가자. 마량 놀토시장에 시비도 세워져 있는 그의 대표작중의 하나다.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

한숨에도 불려갈듯 보-하니 떠있는
은빛 아지랑이 깨어 흐른 머언 산둘레
구비 구비 놓인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

헤어진 섬돌에 떨든 햇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어슴어슴 들우에 깔리여갑니다
홋홋달른 이 얼골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님이여 가이 없는 나의 마음을 아르십니까

평론가들은 이 시가 김현구의 고향인 강진앞 바다와 그곳으로 흘러드는 푸른 강물, 그리고 사계를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 그런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실하고 뜨거운 정염으로 불타는 낭만과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문학평론가들의 말은 어찌나 어려운지, 사람의 머리를 빙글빙글 돌려 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낭만과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대목은 현구 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한마디로 함축한 것 같기도 하다. 낭만이 불타다니... 어떻게 하면 낭만이 불탈 수 있을까.

필자는 마량 놀토시장 시비에 세워져 있는 이 시를 읽을 때 마다 어디론가 자꾸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다리위에서 퍼런 강물을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 그러면서도 자꾸 그곳에 뛰어들고 싶은 유혹 또는 퍼런 강물이 나를 자꾸 빨아들이는 유혹, 무엇보다 영화 ‘괴물’ 속에서 나오는 장면이 있다. 한강다리위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강물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물이 그렇게 ‘퍼럴’ 수가 없었다.

현구의 시는 이렇듯 자신을 최대한 낮추면서 사람을 상상의 세계로 몰고가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시가 만약 30년대에 널리 알려졌다면 영랑 못지 않은 명성과 영향력을 누렸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는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결백하면서도 비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김선태의 ‘김현구시연구’ 참조), 지나치게 결백해서 자기 작품 수준이 낮고 가치가 없다고 늘 생각했다( ̒현구시와 삶의 재조명̓ 심포지엄 자료. 전남문인협회 이순자 지회장의 글 참조).

1970년 발행된 ‘현구시집’에는 당시 차부진 선생이 ‘내가 아는 현구시인’이 란글을 실었는데 현구의 성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차부진 선생은 현구의 삶에 대해 ‘고독, 명상이 생활 전체였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부진 선생은 현구시인이 ‘고독을 즐기는 사람, 감상적이며 폭발적인 성격의 소유자, 세속의 서러움을 혼자 걸머지고 울고 웃는 사람, 또 유달리 어머니를 그리워 하면서도 쉽사리 남에게 정을 주지 않은 사람, 고집이 유달리 세면서도 막걸리 한잔 마시면 「나는 바다에 뜬 갈매기 외로운 갈매기야」라고 말했다’고 적었다.(‘현구시집’ 170페이지 참조)

지금까지 현구시인에 대한 늦지만 다양한 연구들이 있었다. 사후 20년만인 1970년 유족들과 임상호 선생을 비롯한 ̒현구기념사업회̓에 의해 유고시집이 나왔고, 그뒤 22년 후에 강진군의 후원으로 ̒김현구 시집̓이 출간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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