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후 재기 몸부림, 어느지역 보다 강했다

뱃길 통해 부산, 인천등 대도시와 교류 활발
강진읍 남포는 남해안 각 섬으로 이어진 교류망 형성

1957년 4월 민간단체인 '다산유적 보존회'가 복원한 다산초당의 모습이다.
1954년 12월, 그러니까 6.25전쟁 정전 후 1년 2개월만의 일이다. 강진선적 배 한척이 부산앞 송도 방파제 앞에서 침몰해 승객과 선원 일곱명이 익사했으며 적재중인던 백미 470가마 싯가 200만환과 45만환 상당의 김이 배와 함께 침몰했다.

사고가 난 배는 마량면 마량리 고명근씨의 19톤급 백야호였는데, 송도 방파제앞 200m 해상에서 부산~여수간 정기 여객선 79톤급 황창호와 충돌해 빚어진 큰 사고였다.

사망자 7명중에 5명이 강진읍 동성리 김모씨, 역시 동성리 이모씨, 마량리 김모씨, 원포리 김모씨등 강진사람들이었다. 이중에서 여자가 3명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배는 강진에서 쌀을 싣고 부산으로 팔러가던 길이었다. 여자들은 쌀을 실은 화물선을 타고 부산에 물건을 사러가는 길이었거나 아니면 강진의 물건을 팔러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많은 인명피해를 낸 사고였지만, 이 사고가 전해주고 있는 것은 전쟁 직후에도 많은 강진사람들이 부산등지에 물건을 팔러다니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 쳤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군동 백금포라는 항구에서 일본으로 방출되던 백미가 이제는 강진사람들에 의해 화물선을 통해 부산으로 판매되는 모습이 당시 사고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강진이 전쟁 직후부터 주민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파괴된 기반시설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나 강진을 중심으로 각 섬으로 연결된 뱃길은 강진에 활력을 불어넣는 숨통 같은 것이였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다산사경첩' 영인본을 발행한 것을 큰 뉴스로 다룬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이다.
50년대 후반 강진의 모습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현재 고흥군 거문도에서 백도행 유람선을 운항하고 있는 황해연 선장은 50년대 후반부터 강진읍 남포를 수시로 드나든 사람이다. 어선에서 돈을 벌던 시절, 거문도 일대에서 잡은 고기를 싣고 곧바로 남포로 직행을 했다. 남포에 오면 여러 가지 물품이 넘쳐났다.

섬에는 귀한 쌀을 구할 수 있었고, 야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남포에 있던 중간상인들을 통해 이뤄졌다. 굳이 강진장에 가지 않더라도 배를 정박하고 남포의 여러 술집에서 몇날을 방잡고 있으면 중간상인들이 고기를 사주었고, 배위에 쌀과 채소를 올려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남포마을에서 중간상인을 하던 주민들의 이름을 술술 외었다. 남포마을에만 술집이 다섯군데가 넘었다.

지금도 선장의 기억속에 선한 것은 강진의 한정식이다. 그때 남포에 배를 대고 강진읍으로 들어가면 섬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한정식 집이 많았다. 여수에도 그런 집이 귀한 시절이다. 거문도와 뱃길로 가장 가까운 고흥은 아예 한정식 문화가 없을 때였다.

오랜만에 한정식집에 가면 상다리가 부러질듯한 상을 차려놓고 술을 마셨다. 그곳에 가면 사회적 직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도 구별하지 않았다. 선장들도, 선원들도 강진의 한정식 한상을 받으면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푸짐했다. 뱃사람들은 현금이 푸짐했기 때문에 강진읍 어느집을 가나 자신들을 반가워했다.

50년 후반 남포에는 거문도에서 가는 배만 있는게 아니였다. 추자도 배도 많았고, 일본을 오가는 상선도 있었다. 일본으로 광석을 실어나르는 배 선원들도 한번 배를 대면 며칠씩 강진읍에 머무르며 ‘강진의 주점 활성화’에 일익을 했다.

황선장은 “지금은 고흥이나 장흥에 간척논이 많아서 쌀이 있지만 당시에는 강진을 가야 고기도 잘 팔리고 섬에서 먹고 살 이것저것 푸짐하게 구입해 올 수 있었다”고 50년대 후반 강진을 회고했다.

남양주에 있는 다산선생의 묘소인데, 강진보다 2년뒤인 1959년 '정다산선생기념사업회'가 출범해 비석과 석물을 처음으로 세웠다.
전염병은 끊임없이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1957년 6월에는 강진에 병명을 알 수 없는 환자 18명이 발생해 보건당국이 진상을 조사중이라는 기록이 있다.

어쨌든 강진은 비교적 빠르게 50년대란 칠흑의 시대를 빠져나오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어려운 경제생활은 예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농촌을 살리려는 의지나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봄에는 보릿고개가 빠지지 않고 주민들을 괴롭히는등 여전히 어려움속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57년 강진에서는 기념비적인 일이 벌어진다.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발족해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폐허가 된 다산초당을 복원하는 것이였다. 배고픔에 시달린 시절, 강진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문화의 중요성을 알고 문화재 복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7년 4월 21일자>에는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발족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려 있다. ‘정다산 선생의 유적을 재건하고 그 유덕을 기리 추모하여 후생의 귀감을 삼기위해 이 즈음 전남대학교문리대학장 이혁씨를 비롯한 유지 사4명의 발기로 정다산 유적보존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다산선생이 생활했던 건물은 1936년 들어서 완전히 해체돼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다산초당은 그렇게 20여년 동안 완전히 폐허가 돼 주변에 '丁石'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57년 정다산유적보존회가 출범하면서 해남 윤씨와 강진 관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중심 건물이 복원됐다.

당시 보존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윤재은씨, 윤재찬씨등이였으며 강진군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다산초당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후술하겠지만 정다산유적보존회의 출범은 1974년에 다산유적지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돼 본격적인 성역화사업 진행으로 연결됐고, 이는 오늘날 다산 유적지가 강진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는 단초가 되었다.

정다산유적보존회는 건물만 복원한게 아니었다. 유물을 찾아 이를 책자로 발간하는 작업도 했다. 첫 작품이 1958년 12월에 나온 ‘다산사경첩’ 영인본 이었다. 다산사경첩은 다산선생이 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때 바라보던 다산초당의 전후좌우에 있는 다조ㆍ약천ㆍ정석ㆍ석가산등의 네 가지 경물을 읊은 시를 행서로 쓴 것이다.

요즘에야 문화재의 사본이 담긴 책을 내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출판기술이 낮은 당시에 강진이란 농촌에서 옛 문화재의 사진을 찍어 책을 낸 것은 보통 귀한 일이 아니였다. 다산사경첩을 말로만 듣고 있던 전문가들도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발행한 책자를 대하며 마치 진품을 대하듯 경하하는 글들을 신문에 실었다. 당시 연세대학교 문과대 학장이였던 홍이섭 선생이 기고해 동아일보 사회면에 크게 보도된 ‘다산 사경첩과 다산유적’이란 글에는 이런 문구가 보인다.

‘이번에 강진의 다산선생유적보존회에 진력하시는 윤재은씨의 노고로 아담한 다산사경첩이 나오게 된 것을 보며 반가움 감출 수 없다. 회상해 본즉 다산초당은 정약용선생의 학문의 본거지였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유적보존회의 활동은 다산의 유적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이였으며, 그 효과는 대외적으로 다산학의 본거지가 강진이였다는 것을 전국에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1959년들어 다산선생의 고향인 남양주(당시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에서도 ‘정다산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그해 12월 선생의 묘소앞에 비 제막식을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다산선생의 묘앞에는 묘비하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1957년 4월 출범한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는 남양주 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였고, 오늘날 강진이 다산학의 본거지임을 확인시키고 있는 거대한 일을 해낸 사람들이었다.

‘다산유적보존회’의 성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59년 1월 23일 강진의 정다산유적이 고적(古蹟)으로 지정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물론 남양주에 있는 다선선생의 유적보다 앞선 결과물이였다. 그렇게 강진은 60년대를 맞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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