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명 / 완도금일고등학교 교사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3번 국도를 따라 강진쪽으로 향하거나 성전면에서 영암쪽으로 향하거나 월남사터와 성전면의 중간 지점에 ‘국보 제13호’라는 입간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3번 군도를 따라 3㎞쯤 가다보면 월출산 동남쪽 능선 자락에 무위사가 있다.

무위사는 「무위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觀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그 후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대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칭하였다.
 
조선 명종 10년(1555)에는 태감선사가 4창하고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無爲寺)로 고쳤다 한다. 이 사적기는 영조 15년(1739)에 당시의 주지였던 극잠이 절을 보수하면서 쓴 것인데, 당시까지 전해오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우선 진평왕 39년(617)이면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토였고, 신라 스님 원효(617~686)가 태어나던 해이다. 또 정종 원년(946)이면 선각대사가 입적한 지 28년이 지난 때이고 선각대사 부도비가 세워진 해로 이미 열반에 든 그가 절을 중창했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선각대사 부도비의 머릿글에 무위갑사(無爲岬寺)라는 명칭과 비문 속에 신라 효공왕 9년(905)에 왕건이 선각대사를 무위갑사에 머물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계속 무위사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세종 12년(1430)에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극락전이 지어지고,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여래내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졌으며, 숙종 4년(1678)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당간지주가 세워지고, 영조 15년(1739)에는 해초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를 입지 않아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남도에서 으뜸이었다던 무위사는 그 후 점차 퇴락하여 「무위사 사적기」가 씌여진 영조 15년(1739)에 이르러서는 극락전과 천불전, 시왕전만 남게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극락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벽화 보존각에 따로 모시게 되었다가 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위사는 세상 어느 절집보다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고, 방문객을 반기기도 했던 곳이었다.

우선 큰 도로에서 절집으로 찾아가는 길부터가 여느 한국의 시골마을들과 전혀 다름이 없는 그저 싸목싸목 길가의 온갖 것들과 이야기나 나누며 걷고 싶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길인데다 절간과 마을이 이웃하고 있어 어떤 종류의 엄숙함이나 경계심이 없이 바로 절간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위한 공덕을 쌓기 위한 중창불사를 탓할 마음은 전혀 없어도 요즘은 무위사를 찾기가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자연스러운 계단으로 조금씩 높아진 절 안 정면에 극락보전이 바로 보이던 허허로움과 여백을 새로 지어진 건물들로 인해 느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서쪽에 선각대사 부도비(보물 제507호)가 있고, 그 뒤로 명부전, 미륵전과 산신각, 천불전, 삼층석탑이 하나, 그 아래쪽에 벽화 보존각과 건너편 요사채가 있을 뿐이어서 월출산 능선자락에 있으면서도 절집 자체가 마치 산자락의 일부인양 산에 안겨있는 듯 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천왕문과 극락전 앞마당 사이에 세워진 종루인지 강당인지 건물부터 위압감을 주고 점점 절간의 경계를 에워싼 듯 한 새로 지은 건물들로 인해 산과 절집이 분리된 듯 한 느낌이다.

나만의 생각이기를...... 그래도 여전히 무위사는 따스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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