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인물사 연재...강진의 역사와 우리조상들의 발자취 따라...

강진일보는 강진인물사를 새로 연재합니다. 강진인물사는 강진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신비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바랍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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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반 재산평가 77억환
지금 돈으로 1조2천억원 가치
1943년 연세대의대에 1억원 기부도

1942년 어느날, 서울에서 강진으로 내려 오던 거부 김충식은 중풍으로 쓰려졌다. 김충식은 평소 고혈압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서울에서 강진까지 내려 온 의사가 있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최동 박사였다. 최동은 구급차를 이용해 필요한 약과 간호사를 대동하고 내려와 김충식의 중풍 증상을 완화시켰다고 한다.

김충식은 다음해 대엽성폐렴(大葉性肺炎)이란 병을 앓았다. 김충식은 나이가 53세에 불과했지만 이런저런 병치레가 많았다. 대엽성 폐렴 때문에 호흡곤란이 극에 달해 사경을 헤맬 정도까지 증세가 악화됐다.
 
그때 최동이 또 강진까지 왕진을 왔다. 최동은 트리아농이라는 앰플을 몇 개 가지고와 김충식을 치료했다. 김충식은 트리아농이란 약 덕분에 소생할 수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최동은 김충식의 아버지 영준(永準)과 친분이 있었다. 최동의 부친이 순천에서 군수를 할 때 두 집안이 인연을 맺었다. 김충식은 아버지때부터 이어져 온 세브란스 전문학교와의 인연으로 몇 차례 생명을 건진 것이다. 그게 고마웠기 때문일까.

그로부터 4년 후 김충식은 최동에게 중대한 제안을 하게 된다. 1946년 10월 18일의 일이다. 김충식은 시가 1억원의 땅을 내놓겠으며, 그 돈으로 재단을 설립해 이익금을 만들어 세브란스의과대학을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거금 1억원을 희사받게 된 세브란스의과대학측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기록을 통해 생생히 알 수 있다.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재단 이사이면서 김충식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정기섭은 당시 ‘쎄브란스’란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동은 김충식 선생의 쾌거, 세브란스의과대학에 금일억원을 희사하심에 대해서 세브란스직원이나 관계자들은 물론 일반사회 모다(모두) 경송하는 바이다. '
 

부동산만 1,215정보... 전라남북도 최고부호
강진, 광주, 보성, 화순, 해남, 장흥, 무안,
영광, 완도, 영암등 전남지역에 땅 없는 곳 없어

김충식
세브란스병원은 1885년 4월에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알렌(Allen,H.N.)이 고종의 위촉으로 설립한 국립병원 광혜원(廣惠院)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운영됐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인 김충식이 거금을 내 놓으면서 자립기반을 만든 것이다. 정기섭은 ‘그동안 받아 온 외국인의 혜택을 보답하게 됐다’고 김충식의 기부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김충식은 동은재단 출범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세브란스의과대학을 위하여 약소한 기부를 하오며 또 세브란스의과대학의 발전을 위해 금후라도 충성을 다하고자 한다’

김충식은 1억원이란 거금을 내놓고 ‘약소한 기부’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충식은 이렇듯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고, 조선의 열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지만 매우 검소했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김충식의 장손자이면서 전 동은재단 이사를 지낸 성균씨는 2000년 한 좌담회에서 할아버지 김충식을 이렇게 회고했다.

‘할아버지는 첫째 생활신조가 검소하셨던 분이에요. 낭비를 안 하시고 검소하시고, 그 대신 큰일을 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어요. 무엇을 나타내려고 안하시고, 동은재단만 하더라도 우리 어려서 중학교 다닐 때 사람들이 만두락이라도 하고 1억이라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 돈 많은 집안의 장손자가 버스값 주세요 하면 안 주셨어요. 걸어다니라고요. 그런데 이러한 거금은 두말 않고 희사하고 아울러 간여를 안하세요’(동은의학박물관 연혁관련 좌담회, 연세의사학 제4권 제1호 참조)

서울 연세대학교의과대학 도서실 3층에 세워진 동은의학박물관. 김충식이 1946년 1억원을 희사한 것을 기념해 세운 의학박물관이다.
연세대학교측은 1976년 교내에 김충식의 기부를 기념하는 ‘동은의학박물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김충식이 기증한 자산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그 가치가 급락했다.

더욱이 해방후 동은재단측이 영등포에 있는 약품공장에 투자한 것이 잘못되어 재산을 거의 상실해 김충식 사후 연세대의과대학에 기부한 돈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오늘날 연세대학교는 교내에 동은의학박물관을 건립해 그의 고마운 정성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1946년 10월 김충식이 세브란스병원측에 기부한 한 1억원은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 김충식은 당시 강진과 화순, 장성, 무안, 함평등의 토지 1만두락(92만평을)를 기증해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그 소출액을 세브란스의과대학에 기증하기로 했다.

요즘 논값으로 평균 4만원을 잡으면 360억원 정도의 돈이다. 요즘 시세로 400억이 안되는 돈이지만, 당시에는 논이 매우 귀할 때고 벼와 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을 때이기 때문에 요즘 시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돈을 기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 당시 김충식의 재산은 얼마나 됐을까. ‘김충식은 자기 땅만 밟고 강진에서 서울까지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땅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에게는 ‘네가 김충식이 아들이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역시 후술하겠지만 김충식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이용해 소작료를 취득하는 전통적 방식으로 부를 축척하면서 이 돈을 다시 금융과 해운, 유통 분야에 투자해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다.

또 농업외 소득에서 나온 돈을 다시 땅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가 자신의 호인 동은(東隱)의 이름을 붙여 만든 ‘동은농장’은 근대적 농업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김충식의 재산을 파악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50년대 초반 당시 전남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송화식(宋和植)이 김충식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세청(司稅廳. 지금의 국세청)을 통해 그의 재산을 파악한 일이 있었다. 그때 파악된 재산이 77억환 정도였다. 당시 하급공무원의 월급이 3천환이었고, 80㎏ 쌀 한가마 값이 1천환이 조금 넘었다고 한다.

이를 요즘 시세로 따져보자. 당시 77억환이면 1천환짜리 쌀을 770만 가마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80㎏ 쌀 한가마가 16만원이다. 16만원짜리 쌀 770만가마를 요즘에 구입하려면 1조2천320억원이 필요하다. 산술적인 계산으로 1950년 김충식의 재산은 요즘 돈으로 1조2천억원 정도가 됐던 셈이다.

재벌닷컴이 2011년 우리나라 1천813개 상장사와 1만4천289개 비상장사의 주식과 배당금, 부동산등의 가치를 평가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 1조원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20여명 정도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 8조5천262억원,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회장 7조1922억원... 이재현 CJ그룹 회장 1조3천700억원,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1조1천412억원등이다. 지금 자산가치만으로 따져도 김충식은 우리나라 부호 20위권에는 들어가는 재산을 가졌던 것이다.

동은재단이 1960년에 김충식의 묘소앞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뒷면에 ‘그 뜻은 이 겨레에게 길이길이 빛나리’라고 쓰여져 있다.
특히 요즘에야 재산가들이 많지만 김충식이 살았던 190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그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일제가 민족자본을 침탈해 갔기 때문에 전통적 지주외에는 돈을 모든 사람이 드물었다.

1930년 일본 농림성 경성미곡사무소 군산출장소가 발행한 ‘전라남도 전라북도 지주조사’라는 자료에 따르면 김충식은 강진, 광주, 보성, 화순, 해남, 장흥, 무안, 영광, 완도, 영암등지에 답 845정보(253만5천평), 전 57정보, 기타 313정보등 총 1천215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같은 규모는 전남북지역에서 최대 규모였다. 화순군 동복면 동복오씨 집안의 대표적 재산가인 오자섭이 893정보로 그 뒤를 잇고 있고, 해남의 윤정현이 829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50정보 이상이면 대지주반열에 포함됐다. 1950년대 초반 77억환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부호 순위에서 최상위급에 있던 규모였던 것이다.

김충식은 1889년 7월 2일 강진읍 동성리에서 아버지 영준(1863년~1928년)과 어머니 임선의(1860년~1909년)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64세되던 1953년 음력 1월 15일 사망했다. 김해김씨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인주(麟柱)로 올라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충식으로 불렸다. 동은은 그의 호이다. 김충식의 아래로는 후식(厚植), 정식(正植), 良植(량식)이라는 남동생과 6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김충식은 학문이 깊었던 작은아버지 영근(永根)으루부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서양학문은 배운적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작은 아버지 경회 김영근(1865 ~ 1934)은 금릉팔경을 지은 학자로 유명하다. 

김충식은 30세를 전후해서 아버지로부터 3천석 소출의 토지를 물려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동생들이 장성한 후 재산을 다시 분배할 것을 전제로 모든 토지를 김충식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김충식은 3천석 소출의 토지를 10여년만에 4만석 소출의 토지로 재산을 늘리는데 성공한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이 1만석지기였다. 김충식은 4만석지기였으니 그 규모를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는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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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않은 김충식의 묘
사후 가족들이 세운 비석도 없다가 2008년에야 세워

김충식의 묘는 병영면소재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다. 비석과 각종 석물은 2008년에야 세워진 것이다.
김충식의 묘소는 병영면 박동리 마장등이란 곳에 있다. 위쪽에는 선친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선친의 묘소는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김충식의 묘소는 의외로 단촐하다.

무덤앞에는 비석도 없다가 1960년 7월 2일 동은재단에서 세운게 전해왔고, 가족들이 만든 석물은 2008년 증손자인 장손 성균씨가 세운게 전부다. 분묘 조성당시 거부의 무덤앞에 비석하나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충식은 아들 4형제가 있었지만 재산을 믿고 맡길만한 후손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충식은 낙담했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반면에 김충식의 묘 바로 위쪽에 있는 부친 김영준의 묘는 호화롭다. 석물이 여기저기 배치돼 있다. 병영면 소재지 일대가 시원하게 보여 나름대로 명당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김충식 부친의 묘소는 상당한 위용을 자랑한다. 김충식의 묘 바로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김영준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50~60석지기 정도의 재산을 1년에 수천석 이상을 수확하는 대지주가 됐다.

그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자린고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색했고, 부자면서도 소와 말의 똥을 말려서 팔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김영준의 묘소앞에는 ‘통정대부비서감승김해김공영준의 묘’라는 묘비가 적힌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충식의 조부 김도순(金道淳)은 구한말 강진현 마두진(현재 마량면)의 수군만호였다. 강진만을 들고나는 뱃길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김충식의 집안은 아마 그때부터 거대한 재산을 축척할수 있는 기반을 닦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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