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명 / 완도 금일고등학교 교사

남쪽으로 가면 마량에 이른다

23번 국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강진만을 끼고 남으로 달리는 길에서 보면 강진의 풍경은 순하고 착하게만 보인다. 오른편으로 한 눈에 봐도 큰 파도 한 번 일 것 같지 않은 잔잔한 바다 너머로 도암면의 느릿한 산줄기들이 가뭇가뭇 이어지고, 바다 가운데 모나지 않은 둥근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허전하게 트이지도 않았고 또 답답하게 막아선 것도 없는 강진만의 바다는 그저 마음을 내려놓기만 하면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안겨든다.

옛날 청자를 굽던 가마터들이 널려있는 대구면을 지나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마침내 마량, 강진 땅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항구에 다다른다. 강진읍에서 고금도가 건너다보이는 마량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특히 해질녘 잔잔한 수면 위로 어둠이 포개질 즈음 바닷길을 따라 내려가다 문득 마량에 도착했을 때, 휘영청 보름달이 물비늘을 출렁이기라도 한다면 누구라도 서남해 포구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방부터 잡아두고 방파제에 나와 편히 주저 않으시라. 그리고 달빛 여울이 일렁이는 잔잔한 바다와 한 몸이 되어 보시라.

이곳 마량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마도진 만호성지가 남아있다. 마량은 예로부터 강진, 장흥, 영암, 해남으로 들어가는 서남해안의 관문이었으며, 장보고가 인근 청해진에 터를 잡고 활약하던 시절에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로의 요충지였다.
 
또 고려시대 이후에는 영남과 호남지방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통과하는 길목이어서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자주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선 태종 때(1417년) 전라도병마절제사령을 강진 병영으로 옮겨오면서 현 강진읍 남포에 있던 강진의 만호진을 마도(마도, 현 고금도)로 전진 배치시켰다.
 
그러다 마도 만호진은 섬 지역에서의 수상생활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육상으로 침투하는 적의 효과적인 방어와 군량, 군기 등의 보관상의 편리를 위해 연산군 5년(1499년)에 마량에 성을 쌓고 이곳으로 옮겼으나 이름은 마도 만호성으로 그대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초 성의 규모는「증보문헌비고」에 석축 890자, 높이 12자, 치첩 300, 곡성 6개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서문과 북문 주변에 약 800m 정도가 남아 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마도진 만호성의 군사들은 을묘왜변과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상의 전면으로는 가막섬과 고금도, 노리묵 등이 이중, 삼중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배후에는 말머리 산의 능선이 휘감아 감싸고 있어 군항으로써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항구로서의 기능도 하였던 마량은 원마, 숙마, 담마, 백마, 음마 등 마을 이름들이나 이곳의 지형이 말의 형국을 닮았다는 이야기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제주에서 건너온 말을 여기서 살찌워 한양으로 보낸 곳이라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로 말과의 관련성이 큰 곳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마량 앞바다에 동그스름하게 생긴 두 개의 작은 섬은 후박나무, 돈나무, 생달나무, 쥐똥나무 등 난대림 120여 종이 밀림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된 까막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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