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서 발견된 토기에 코큰 아랍인의 얼굴

함평에서 발견된 깨진 토기에서 서역인의 얼굴이 선명하다. 큰 코와 더부룩한 턱이 인상적이다.
6세기 유물... 서남해안 지역도 아랍인들과 교역증거

몇 년전 양광식 강진문화재연구소 소장이 한 지역신문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남부에 위치한 아랍에미레이트 사람들이 6세기에 대구면의 하저쯤에 왔다 갔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아랍에미레이트 사람들은 국제무역을 하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강진의 해양역사적 가치는 물론 청자의 유입과정등에 대해서도 또 다른 시각을 검토할 수 있는 사안이였다. 

양소장은 해양실크로드 연구의 대가인 정수일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전해들을 이야기라고 했다. 2008년 정수일 교수가 다산강좌를 위해 강진에 온 적이 있다. 고령의 정교수에게 그 이야기의 출처를 물었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였다.   

갑자기 함평의 역사향기라 이름 붙힌 것은 함평에서 발견된 유물중에 꼭 소개하고 싶은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광주국립박물관에서 의미있는 유물을 구경하게 됐다. 박물관 1층에 전시중인 유물의 이름은 ‘서역인의 얼굴이 새겨진 토기’였다. 깨진 완형토기 한 조각에 있는 서역인의 얼굴은 매우 작아서 박물관측은 유물앞에 커다란 돋보기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얼굴은 서역인이 분명했다. 서역인이라면 아랍인들을 의미한다. 큰코가 두루뭉실하게 강조되어 있고, 완강한 턱도 인상적이다. 터번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머리에 쓰고 있는 것도 금방 서역인을 연상시킨다.

2003년 함평군 창서유적에서 이 유물을 발견한 호남문화재연구원발굴팀은 ‘토기는 6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고, 토기에 새겨진 얼굴은 대체적으로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결론지어 보고서에 썼다.

6세기에 그러니까 서기 500년대에 함평, 또는 인근지역에서 아랍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었고, 그 얼굴을 그릇에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그 서역사람은 아랍땅에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억만리 함평땅까지 왔었을까. 그게 과연 사실일까. 또 왔다면 어떻게 왔다는 말일까.

신라 고릉에서 발견된 서역인 모양의 토우들. 그동안 호남쪽에서는 서역인 관련 유물이 나온 적이 없었다.
역사학계에서 아랍인(또는 아라비아, 서역인, 대식인등으로 불림)들과 신라의 교역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정설로 내려온다. 정수일교수(일명 깐슈)에 따르면 기원전 바빌론과 유프라테스강 하구에서 시작돼 동진을 계속해 오던 남해로(南海路)는 인도와 미얀마, 말라카해협을 거쳐 7세기 들어 남중국 지역까지 도착해 서역인들이 많이 이동해 왔다.

당나라는 651년에 첫 공식사절을 맞은 때로부터 147년동안 39차례의 아라비아 사절을 맞았다. 비슷한 시기에 페르시아 사절단도 34차례나 받아 들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활동한 9~10세기에는 절강성 양주지역에 거주하는 서역인의 숫자가 1만5천~2만명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및 통일신라와 아랍인들과의 교류도 빈번하게 일어나서 무역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경주시 괘릉의 석상이 전체적으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밖에도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경주 황성동 석실분에 부장품으로 출토된 토용가운데 뾰족한 호모를 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토용이 출토되었다. 또 경주 용강동 석실분에서 출토된 석실분도 역시 덥수룩한 수염이 표현된 서역인의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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