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 1,500여명중 절반 이상이 전남 사람들

행상에서 시작 이제는 어엿한 점포주인
억척스럽게 돈 모아 제주에 뿌리 내려


제주에서 가장 큰 오일시장인 제주민속오일시장은 전국에서 손끕히는 시장이다. 제주에 오는 관광객들은 반드시 이곳에 들려 제주의 문화를 경험한다.

제주시 연동 제주시 민속오일시장은 제주도에서 가장 큰 오일시장이다. 장이 열리는 매달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이면 이곳은 완전히 관광지가 된다.

제주도 전체인구가 60만 명인데 장날 하루 평균 9만 명, 주말을 끼면 12만 명이 넘는 손님들이 이곳 민속오일시장을 찾고 있다. 중소시장경영진흥원이 선정한 ‘가고 싶은 전통시장 50선’에도 꼽혔다.

이 시장의 상인회 회원은 1,500명. 이중 절반이 넘는 800명 이상이 전남 사람들이다. 강진국밥집, 해남순대집등 전남 지명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이 사람들은 제주오일장은 물론 서귀포 풍물시장, 구좌읍 오일시장, 모슬포 오일시장, 대정읍 오일시장등 각 시장을 휩쓸고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다. 이 오일시장들은 모두 다른 날짜에 서기 때문에 이들의 상업 활동은 매일같이 계속된다.

전남 사람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가장 쉽게 할 수 있었던게 막일과 바로 이 시장 상인이였다. 좌판은 약간의 현금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였다. 그렇게 모아서 점포를 마련해 오일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오일시장 상인회에 전남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도암이 고향인 강태수, 이연이씨 부부가 채소전을 운영하고 있다.
오일시장에서 채소점을 운영하는 강태수(71)․이연이(72)씨 부부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82년에 제주도에 들어왔다. 고향은 도암 옥전마을이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훌쩍 제주도로 이사왔다.

처음에는 막노동을 하면서 10여년 동안 봉급자 생활을 했다. 돈을 약간 모았다. 그래서 벌린 일이 기러기 농장이였다. 기러기만 잘 키우면 큰 돈을 번다는 말이 있을 때였다.

그러나 묘하게 IMF가 터졌다. 현금 3천만원을 날리고, 빚이 3천만원이 생겼다. 완전히 망해서 좌판을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봐서 채소장수를 시작했다. 좌판을 하다가 약간의 돈을 모았고, 제주민속오일시장이 상설화되자 추첨을 해서 현재의 자리를 얻었다.

“제주도에서 안 해본 일 없이 다 했다고 보면 되죠. 세월이 간께 어떻게 먹고 살방법이 생기더라니까”
최근 제주민속오일시장에서 만난 강태수씨 부부의 채소전은 쉴새없이 바빴다. 앉아있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 손님들이 물건을 사러 오기도 하고, 식당에 물건을 배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씨부부는 고향에 선산이 있기 때문에 일년에 한두번은 꼭 강진에 온다고 했다. 

이곳 오일시장내에서 신용 하나로 제주사람들의 신뢰를 받아 적지 않은 사업을 일으킨 사람도 있다. 지금은 은퇴하고 쉬고 있지만, 3년전만 해도 제주시민들이 애용하는 제주시 연동에 있는 민속오일장에 가면 인파를 가로질러 사람들이 40여m 이상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곳이 있었다. 이 줄은 거의 하룻내 이어질 때가 많았다. 궁금증에 사로잡혀 사람틈을 헤치고 한발 한발 줄을 따라가 보면 스포츠 머리에 운동화를 신고 4대의 뻥튀기 기계를 연신 튀어대는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쌀 뻥튀기를 비롯해 누룽지 뻥튀기, 콩 뻥튀기, 강냉기 뻥튀기 등을 해서 장날이면 10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사람. 연간 40㎏ 짜리 쌀을 200여 포대 넘게 소비하는 뻥튀기 상회 사장님, 제주오일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 바로 강진읍 교촌리 출신 이동만(77.제주시 용담2동)씨였다.

한쪽에서는 이씨의 부인 김애자(74)씨가 강정을 팔았다. 강정을 사려는 사람들도 한쪽으로 줄을 섰다. 이씨의 상점에는 거의 모든 농산물들이 뻥튀기로 탄생해 손님들을 맞았다.

이동만씨는 10년 전에도 매출 500만원 이상을 올리는 뻥튀기 상회의 유명 CEO(최고경영자)였다. 그러나 그가 걸어 온 길은 제주도에 사는 다른 향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험난하기만 했다. 이동만사장은 1970년대 초반에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행 삼화호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끼니는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정부미 한포대를 샀는데 그만 돈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호남사람이라며 잡부 일도 얻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달 정도를 놀다 어렵사리 건설현장의 잡부일을 얻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결과 자신을 고용했던 제주사람의 신임을 샀다. 그러나 2년째 되던 해에 갈비뼈에 금이 가는 사고가 났다. 제주사장은 이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와 일을 못하는데도 품삯을 주며 완쾌하면 함께 일을 하자고 하기도 했다.

이씨는 더 이상 건설현장일을 할 수가 없어 목포에서 해 보았던 뻥튀기를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돈이 한푼도 없었다. 그때 이씨를 도와준 사람이 자신을 고용했던 제주사장이었다. 제주사장은 담보도 없이 당시 100만원을 선뜻 빌려줬다. 이씨의 됨됨이를 보고 빌려준다는 것이었다.

이씨는 그길로 목포로 가서 뻥튀기 기계를 사왔다. 70년대 초반부터 이씨의 뻥튀기사업이 시작됐다. 당시에는 시장이나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뻥튀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씨는 철저히 정직을 중시했다. 쌀 한되를 가져오면 쌀을 조금 빼 놓아도 한되 분량이 충분히 나왔다. 그러나 이씨는 한톨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튀겨주었다. 한가마니를 튀기면 한가마니 분량만 나오던 뻥튀기가 이씨에게 가져가면 한가마니 하고도 몇되의 분량이 나오자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씨가 정직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쌀을 한가마니 이상 가져오며 뻥튀기를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시중에서 가계를 하는 사람들도 이씨에게 물건을 가져갔다.

이씨는 인근 제주시 농협에서 쌀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꼭 강진쌀을 구입해야 한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농협에서는 지금도 이씨가 큰 식당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70년 중반부터 그렇게 돈을 벌었으니 중간에 다른 사업을 생각했을 법도 하지만 이씨는 오직 뻥튀기 사업에 일념했다. 이씨는 돈이 모아지자 가장 먼저 옛날 고향을 떠나오면서 남겨두고 왔던 막걸리값까지 갚았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제주에서 고생한 만큼 가장 떳떳하게 고향에 가고 싶은 게 이씨는 물론 모든 향우들의 소망이다.

“제주와서 육남매 잘 키웠으니 한이 없습니다. 나를 먹고 살게 해준 제주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제주도에 들어와 오늘날이 있기까지 옛날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씨의 눈은 마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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