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3천만원 준다고 했지... 그러나 팔지 않았어

김홍순 어르신이 자신의 앞마당에 있는 700년 이상된 향나무앞에 서있다. 오른쪽 마른 부분은 이미 죽은 부분이고 왼쪽 김어르신의 손이 닿아 있는 부분이 살아 있는 줄기로 이 나무에 양분을 공급하는 유일한 생명줄이다.
조선땅서 수백년 자란 향나무
일본인에 팔린게 가장 아까워
그런것은 국가가 지켜야 했다.

송학리 소나무의 자태는 마치 기러기가 모래위에 내려앉은 평사낙안(平沙落雁)모습이다
2대 못가는 부자소리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돈보다 가치있는게 많다

2억3천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일본으로 갈거라고 했다. 딱 10년전 일이다. 그렇게 해 보마고 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잠을 깨었다.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 졌다. “내가 저 나무를 팔아야 먹고 사나”
단번에 말을 물리쳤다.

매년 향나무를 팔라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올해도 벌써 3~4번 사람이 찾아왔다. 나무를 팔면 헬기를 이용해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쇠귀에 경읽기다.

성전면 송학리 김홍순(77)어르신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마당 한쪽에 있는 향나무 앞으로 간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공손히 절을 올린다.

올해로 700~800년이 된 향나무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만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 다 죽어가던 나무에서 푸른 잎이 나왔다. 그 잎이 다시 컸다. 한쪽에서 줄기가 살아났다. 그런 과정을 겪다보니 나무 모양이 절세미인이다.

높이는 5.5m다. 직경 1.5m에 달한다. 위쪽은 마치 기러기가 모래톱에 내려앉은 듯한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모습이다. 죽은 고목을 휘감고 올라가는 붉은 줄기는 마치 살아 있는 용을 보는듯 하다.

절세미인을 가만 놔둘 리가 없다. ‘송학리 향나무’가 조경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저 나갔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강릉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격은 10년전 2억3천만원을 들었을 때가 마지막이였다. 그 뒤에는 가격을 물어보지도 않고 되돌려 보냈다.

한 40년전이던가. 서울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다. 서울 요지에 집 두채를 사주겠다고 했다. 향나무만 팔면 서울에 집이 두채나 생길 판이었다. 그러나 딱 거절했다. 그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서울에 집 필요없는 사람이요” 다행히 가족들이 그 뜻을 이해해 주었다.

경향신문 1982년 3월 6일자에는 식목일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제일가는 관상수를 소개하는 글이 있다. 신문기사에는 수목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았다며 우리나라 최고 관상수로 서울시 효자동에 있는 ‘500년 이상된’ 향나무를 꼽았다. 신문은 ‘이 나무의 가격이 아파트 한 채에 해당된다는 3천만원이나 된다’고 소개했다.

이를 비교해 보자. 송학리 향나무는 40여년 전에 집 두채값을 제시 받았고, 효자동 향나무는 30년 전에 아파트 한 채값인 3천만원을 홋가했다. 누가 비싼지 금방 비교가 된다. 아마도 당시 기사를 쓴 사람은 전남 강진군 송학리에 있는 향나무를 듣지 못한게 틀림없어 보인다.     
   
김홍순 어르신에 따르면 전남지역에는 모양좋은 향나무가 꽤 있었다. 진도 울돌목과 영암 덕진면, 영암 독천, 해남 황산, 순천 송광사에 700~800년 이상된 향나무가 있었다. 젊었을 적에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좋은 향나무가 있다는 곳을 찾아 다녔다.

또 서울 남산공원 향나무와 서울 서초구 4거리에 있는 향나무도 그 연배에 들어가는 향나무들이였다. 그러나 지금 이 향나무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송학리 향나무와 서초구 4거리 향나무, 송광사 향나무가 남아 있을 정도다.    

향나무의 근황을 살펴보니 영암 덕진면 금강리의 향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13호로 보호됐으나 1975년 완전히 고사됐고, 남산 향나무는 1978년에 역시 고사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마른 가지밖에 없다.

김홍순 어르신이 말하는 서초구 4거리 향나무는 서울 서초역 사거리 도로 가운데에 위치한 수령 870년의 향나무를 말하는 것이였다. 이 향나무는 아직도 자태가 좋아서 매년 이맘때 물주기 행사를 하는게 큰 뉴스다. 송광사 향나무는 곱향나무라고 해서 두 그루가 나란히 있는게 장관이다.   

나머지는 모두 다른 곳으로 팔려갔다. 나머지는 ‘꽤 좋은 가격’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일단 부산으로 가져간다고 해요. 그곳에서 몇년 정도 다시 키우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합디다. 그러면 일본에서 다시 미국이나 대만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징한 사람들이지요. 아마도 전라도 좋은 향나무 몽땅 일본으로 넘어갔을 겁니다”

향나무는 우리 조상들에게 신성한 나무였다. 향나무는 조상들께 제를 올릴 때 가장 성스러운 향재료이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성스러움이 크다고 믿는다. 또 매향(埋香)이라고 해서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오래된 향나무를 강이나 바다에 뭍었다. 훗날 이것을 다시 파내 사용하는 것을 침향이라고 한다. 매양을 동양적인 메시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향나무의 역사는 깊다. 보통 500년 이상은 되어야 향나무 대접을 받는다. 매향을 할때도 수백년 이상의 것을 뭍고 침향을 위해서는 보통 300년 이상은 물이나 갯뻘속에서 지낸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난다고 한다. 향나무는 이렇게 보통 몇 백년씩의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김홍순 어르신은 그런 나무를 외국으로 팔아 넘긴게 영 탐탁하지가 않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팔게 있고 팔지 말아야 할게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향나무는 참 이상해요. 작은 나무를 키워보면 한 20~30년 동안은 조금 큰 것 같은데 그 후에는 도무지 변하지가 않은 것 같아요. 기백년은 넘어야 모양이 잡힌가봐요. 내가 심은 향나무는 당대가 아니라 2~3대 후손까지는 그 모양을 못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좋은 향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먼 윗대 조상님들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국에, 그것도 일본사람들에게 넘겼으니...”

일본사람들이 향나무를 사간 것은 일제강점기때가 아니다. 6.25 전쟁이 끝난 시점이였다. 갑자기 향나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일본사람들이 향나무를 사가는 방법은 그랬다. 먼저 괜찮은 향나무가 있다는 소문이 있으면 부산 사람을 중간에 세워 나무 주인에게 보냈다.

중간상인이 강진까지 와서는 협상을 하고 사진을 찍어 일본으로 보냈다. 나무 모양이 괜찮다고 판단하면 일본사람이 직접 한국에 나왔다. 최종 계약이 이뤄지면 본격적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보통 전라남도지역에서 부산까지 향나무를 옮기는 기간이 일주일 이상이 소요됐다.

나무의 덩치가 있고, 주로 밤시간을 이용해 옮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산으로 이동한 향나무는 다시 땅에 심어 5~6년을 키웠다. 1차 적응시간을 갖는 것이다.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갈 때는 대형 화물선이 이용됐다. 일본 지역 부두에 하역된 향나무는 다시 일본 현지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향나무를 구입한 사람이 직접 소유를 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였다면 그 사람의 정원에 심으면 끝났지만, 중간상인이 구입한 경우에는 다시 일본땅에서 2~6년을 뭍혀 새 주인을 기다렸다. 나무값을 2억을 치더라도 실제 부대 경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미국이나 대만으로 팔려간 향나무도 있었다고 하니 전라도를 출발한 향나무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참 징한 사람들이예요. 저 나무를 파가서 안착시키는데까지 한 6~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대단한 정성이예요. 그런데 그런 나무를 다른 나라에 팔어넘긴 사람들은 뭐랍니까. 국가가 지켜도 지켜야 했어요.”

김홍순 어르신이 고집스럽게 지킨 덕분에 강진에 살아남은 ‘송학리 향나무’지만 그렇다고 그 운명이 화려하지는 않다. 주변 물길이 막히면서 세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무모양은 좋지만 전문적으로 관리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생명이 위험하다는게 나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홍순 어르신이 작고한 후 고집스럽게 저 나무를 그렇게 지킬 사람이 있을지도 걱정이다. 100년 후 저 ‘송학리 향나무’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돈은 아무리 많아도 2대를 가기 어렵습니다. 요즘 보세요. 50년전 부자들 지금 몇이나 남아 있는지. 그런데 돈만 벌려고 난립니다. 그렇게 벌어서 뭘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자식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김홍순 어르신의 덕담을 들으며 마당갓쪽에서 700번째 봄을 맞고 있는 ‘송학리 향나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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