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화운동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후 가장 큰 사건

그 일을 발의하고 주도했던 금오스님
오늘날 한국불교가 있게 했다

제5차 W.F.B 캄보디아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금오대선사(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 제일 우측이 청담스님이다. <사진= ‘금오스님과 교정화운동’>
이승만 대통령 하야후 대처스님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던 불교정화운동 국면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구테타를 일으킨 후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비구스님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던 대처스님들의 소송을 이유를 불문하고 취소하게 했다. 대처스님들이 이승만 대통령시절 빼앗겼던 절을 다시 되찾기 위해 4.19혁명 후 여러 가지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를 강제로 취소하게 한 것이다. 당시 법원에 계류중인 소송이 8년 동안 80여건이나 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불교정화운동의 업적을 인정하고 비구스님들이 중심이 된 통합종단을 출범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대처스님들이 함부로 절 재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불교재산관리법도 제정했다. 이 세가지는 이승만정권의 8차에 걸친 정화유시와 함께 비구스님들에게 힘을 실어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불교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모든 정치적 흐름은 비구니 스님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가최고위원회의 요구에 외면하지 못한 비구와 대처 양측은 1962년 1월 18일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한다. 이에따라 1954년 시작된 불교분규는 최초로 자율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가닥을 잡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불교재건위원회는 세차례 회합을 가진 후 대처와 비구 양측이 참여하는 비상종회의원을 선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구와 대처승이 한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양측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가장 큰 충돌이 새로운 종헌을 선포하는 문제였다. 새로운 종헌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이 비구승들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직시하고 있는 내용이였다. 이에대해 대처승들이 반발했다. 양측이 다시 대립했다.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불교스스로 불교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기존에 대처승과 비구승이 참여했던 불교재건위원회에 사회저명인사 5명을 포진시켰다. 비구와 대처의 대립으로 비상종회가 파행적으로 운행될 경우 사회인들이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불교계 스스로가 종회를 구성하지 못하고 사회인사에 의해 재건위원회가 강제적으로 주성된 것으로 불교계 입장에서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비구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서 비상종회는 116조로 된 새 조헌을 제정하고 대처승들도 이를 수용하는 결과가 나왔다. 새 종헌의 핵심은 비구측에서 종정을 선출하고 총무원장은 대처측에서 맡기로 한 것이였다. 한 지붕에서 두 성격의 스님들이 동거를 한 형태였다. 이후 1962년 4월 11일 역사적인 통합종단이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통합종단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비구스님들에게 유리한 구조로 짜여져 있었다.

대처스님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승려의 삶을 살아가는 두 집단이 한 종단안에서 동거하는게 오래갈 리가 없었다. 결국 일부 대처스님들이 새로운 종헌은 무효라며 다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또 재건비상종회에 참여하고 있던 대처승들이 퇴진하면서 통합종단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대처스님들은 ‘한국불교조계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독립 종단을 만들었다. 또 비상종회의 모든 결정이 무효라며 300여건의 소송을 제기하는등 양측은 다시 극한 대립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969년 10월 22일 대법원이 한국불교조계종 소속 대처스님들이 제기한 ‘종헌결정 및 종정 추대무효확인’ 소송에서 ‘이유없다’고 기각하면서 그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 판결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비구 스님들의 정통성을 인정한 가운데 나온 것이여서 길고 긴 불교정화운동에서 비구승의 최종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였다. ‘결혼한 스님들은절을 떠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대로 결혼하지 않은 비구승들이 주요 사찰을 인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처스님들은 1970년 1월 박대륜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통합종단에서 분리, 태고종(太古宗) 종단을 발족하고 '한국불교조계종'과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태고종은 그렇게 해서 발족된 종단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분쟁 당시 재산 정리가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음으로서 태고종 스님들이 현재까지 조계종 사찰을 강제로 점유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 곳이 있다. 비교적 큰 사찰인 서울의 봉원사와 백련사, 선암사, 법륜사, 봉서사, 청량사, 용궁사들이 그런 사찰들이다.

최근까지도 정부의 중재로 조계종과 태고종 스님들이 한자리에 만나 재산문제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양측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곤 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이런 형태로 시간을 끌며 서로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953년 5월 금오스님에 의해 발의된 한국불교정화운동은 1972년 3월 대처측이 대법원 판결에서 최종 패소함으로서 비구스님들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임을 인정받고 주요사찰을 접수했다. 19년이라는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였다. 그동안 우리나라 불교계는 많은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오늘날 수좌성신을 잃지 않고 면면히 정통불교의 맥이 이어져 오는 것은 그 19년의 정화운동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계종 스님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불교정화운동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한 것은 강진 출신 금오스님이 발의한 한국불교정화운동이 그만큼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금오스님의 행적을 잠깐 따라가 보자. 금오스님은 1954년 5월 59세때 불교정화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55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으로 추대된다. 정화불사는 숱한 법난과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가느다란 불빛을 찾을수 있었다. 스님은 56년에는 대처승이 거처하던 서울 강남의 봉은사를 접수하고 그곳의 주지로 봉직했다. 이에 속리산 법주사와 지리산 화엄사의 주지를 잇따라 맡으며 숱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물론 금오스님이 이 사찰들의 주지를 맡기 전에는 결혼을 한 대처스님들이 가족과 함께 절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비구스님들이 대처스님들이 거처하던 사찰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지만 금오스님이 가는 곳은 별다른 마찰없이 절을 인계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대처스님들도 대 선승으로서 금오스님의 법력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금오선사는 이후 종단의 여망에 따라 1958년 종단행정의 총책인 총무원장직을 6개월 맡은 적이 있었고 이후에는 대구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이후 1961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5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서 세계 불교계의 현안과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60대 후반에 이르러 금오선사는 경기도 시흥 청계사에서 오랫 동안 머문후 67년에는 충북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조실을 맡아 그곳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에서 금오선사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오늘날 한국 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스님들의 상당수가 금오선사의 직계 제자들이다.

한국 불교 정화운동의 주역이며 한국 간화선의 법통을 경허, 만공, 보월선사로부터 이어받은 금오선사는 월산스님에게 가풍을 전한 뒤 1968년 10월 8일 저녁 7시 15분 속리산의 고요속으로 조용히 입적에 들어갔다. 세수 73세였으며 법랍(스님이 된 나이) 57세째의 날이였다.

금오선사의 법구는 5일 동안 향불속에 감싸여 있다가 조계종 종단장으로 봉행됐다. 이때 1,000여개의 만장과 만여명의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비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는 참선을 하는 스님들 치고 금오스님의 지도를 받지 않은 스님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 위치가 절대적이다. 금오선사가 마지막으로 머물다 입적한 법주사는 금오스님의 법맥이라고 할수 있는 금오문중의 센터로서 금오스님의 가풍을 계승하고 있는 곳이다.

금오선사의 직계제자이면서 법주사 주지를 역임한 월탄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금오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최초로 발의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 불교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일본의 왜색불교가 넘쳐나 사찰은 악행들로 넘쳐나지 않았겠습니까. 금오스님이 발의한 한국불교정화운동은 고구려 소수림왕때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일어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였습니다”

1896년 7월 23일 병영면 박동마을에서 태어난 금오스님은 1912년 3월 15일 16세의 나이로  금강산 마하연선원으로 출가한 후 57년 동안 선승으로 살면서 한국불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갔다.<끝>

다시 보는 금오스님의  연보
-1896년 7월 23일: 병영면 박동마을 태어남
-1912년 3월 15일: 16세때 금강산 마하연선원으로 출가
-1921년 8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일봉 율사로부터 수지
-1925년(30세): 정혜사에서 만공선사로부터 보월선사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건당식 봉행
-1935년(40세):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첫 조실 지냄. 계속해서 안변 성왕사, 도봉산 망월사, 청계산 청계사, 지리산 칠불선원, 모악산 금산사, 팔공산 동화에서 조실 역임
-1954년(59세): 전국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 선출
-1954년 5월: 불교정화추진위원장에 선출
-1955년(60세):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과 감찰원장으로 추대. 서울 봉은사 주지.속리산 법지주 주지 취임
-1956년(61세): 구례 화엄사 주지 취임
-1958년(63세): 조계종 총무원장 피선
-1961년(66세):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5차 세계불교도대회 한국수석대표로 참석
-1967년(72세): 법주사 주지 취임, 조실스님 역임
-1968년 10월 8일 속리산 법주사 사리각에서 입적. 향년 73세, 법랍 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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