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정통성이 누구에게 있는가

절체절명의 기로에 선 대처승과 비구승
이승만 정권 무너진 후 대처승 유리한 구도

1955년 7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인 어느날 불교계 대표들이 이선근 문교부장관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좌측에서 두번째가 금오스님이다.
사찰 주도권을 놓고 1954년 5월부터 벌어진 비구스님과 대처스님들의 첨예한 갈등은 55년 7월 법원의 한 판결로 중대한 분수령을 맞게 된다. 54년 11월 8일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진입해 강제로 간판을 내리고 조계종 중앙종무원 간판을 내건 것에 대해 대처스님들이 불법행위라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8개여월의 긴 재판 끝에 법원이 비구스님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법원의 이같은 판결은 조계사를 관리해야 할 주체가 바로 비구스님이라는 것을 최초로 인정하는 것이였다. 비구스님들의 조계사 관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전국의 사찰 관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반면에 대처승들은 조계사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함으로서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비구스님들은 이 여세를 몰아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한다. ‘독신 승려가 아닌 사람들은 절을 떠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독신승려가 아닌 승려들은 절을 떠나라는 것은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의지이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대처스님들은 그해 8월 1주일만에 167명이 이혼을 하고 2,000여명이 이혼수속을 밟는등 나름대로 대처를 하고 나섰다.

1955년 8월 1일 역사적인 전국승려대회가 조계사 법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전국승려대회의 백미는 구산스님이 혈서를 쓴 일이였다. 구산스님은 훗날 송광사 방장스님을 지냈던 분이다. 그는 5m가 넘는 종이에 425자에 달하는 장문의 혈서를 썼다.

비구스님들은 전국승려대회에서 아직까지 대처스님들이 장악하고 있던 총무원 구조를 완전히 바꾸고 국가의 헌법에 해당되는 종헌도 바꾸어 버렸다. 종조를 태고보우스님에서 보조지눌스님으로 바꾸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도 단행했다. 이때를 즈음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6차 불교정화유시를 발표한다.

‘승려가 처를 데리고 사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승려들의 종교적 신앙과 조리가 일본 승려들의 그것과는 특별히 다른 것이 몇백년 계속되어 왔던 것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여 한인들의 다 일본화시키려 할 때 한국에 충성하려던 스님과 교도들은 다 물러났고 일본에 충성하는 새 승려들만이 사찰을 차지했으니 이에 친일하던 승려들은 오늘에 와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것임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일이다. 혹 대처승들이 갈 곳이 없거나 생계가 없다면 정부에서 다른 방면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니 이 정부의 방침에 항거하지 않은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이대통령의 6차 유시는 승려가 처를 데리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는 한국의 불교와 왜색불교의 차별성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였다. 한국의 정통불교는 근본적으로 왜색불교와 다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일합병 후 자신에게 항거하는 승려는 사찰에서 몰아내고 친일하는 승려들을 사찰 주지로 임명했는데도 불구하고 해방후에도 그런 승려들이 사찰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였다.

이같은 분위기에 더불어 전국승려대회에서 의결한 사항들은 문교부의 최종 인가를 받아 내는데 성공한다. 1953년 금오스님에 의해 최초 발의되어 추진된 불교정화운동이 1년 3개월만에 법적으로 승인을 받은 역사적인 순간이였다.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불교계 분규는 결국 1년 3개월만인 1955년 8월 13일 수습대책위원회에서 표결에 부쳐 합법적인 절차를 받아 종식되고 불교정화운동은 비구승들의 승리로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대처승들이 사찰에서 물러나는 것과 총무원의 사무를 인계받는 일이였다.
비구스님들은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전국의 사찰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구승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 비구승은 800여명에 불과해서 대처승이 나간 수백개의 사찰에 임명할 주지가 턱없이 부족할 정도였다.

더큰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였다. 대처승들은 사찰에서 나갈 것에 대비해 이미 많은 식량을 개인집으로 옮겨놓은 상태였다. 절에는 식량이 극히 부족했다. 비구승들은 정부지원식량을 받기도 했다. 또 사찰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기업체가 일시적으로 가동을 중단하면서 경제적 손실이 컸다. 당시 불교계가 해방 직후에 불하받은 일본인 재산은 공장, 극장, 회사, 운수회사등 13개에 달했다.

대처스님들의 저항도 당연히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찰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많은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행정부는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비구승들을 지원했지만 사법부는 절차의 합법성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당시 사법부는 일제강점기때 활동한 법관들이였고 일제강점기 사찰령이 그대로 존속됐기 때문에 법은 대처스님에게 유리한 편이였다.

1955년 8월 12일 전국승려대회이후 대처스님들이 제기한 소송이 무려 80건이 넘었다. 그 와중에 법원에서 사태를 뒤집을만한 중대한 판결을 하게 된다.

1956년 6월 15일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 및 불교정화대책위원회 결의’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사태를 일거에 반전시킨 법원의 판결이였다.

1955년 8월 13일 조계사 경내에서 열린 제4차 전국승려대회 모습이다.
대처스님들이 승소한 직접적인 근거는 ‘전국승려대회 및 불교정화대책위원회의 결의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또한 문교와 내무부등 정부의 관계기관이 부당하게 간섭했다’는 이유였다. 비구스님들은 즉각 고등법원에 항소한다. 고등법원은 비구스님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국승려대회의 결의를 인정해준 것이다. 이에대해 대처스님들이 즉각 대법원에 항소를 했다.

양측은 이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과연 대한민국의 불교 정통성이 비구측에 있느냐 아니면 대처측에 있느냐‘는 매우 중차대한 결정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결정되는 순간이였다.

이 와중에 또 한번의 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중인 1960년 4월 19일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그동안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비구스님들에게는 큰 절망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처스님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6월 9일 대처스님들은 모임을 갖고 비구승단을 ‘관제불교단체’로 규정하고 정화운동 이전으로 사태를 환원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전국의 사찰에서 절을 다시 차지하려는 대처스님들과 이를 지키려는 비구스님들간에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을 앞둔 1960년 11월 20일, 비구스님들은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승례대회를 열었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불교정화운동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 11월 24일, 대법원에 계류중인 소송이 드디어 5년만에 판결을 내리게 된다. 대법원 판결은 불교정화운동의 결산이기도 했다. 과연 한국불교의 정통성이 결혼을 하면서 승려생활을 한 대처스님들에게 있는지, 독신생활을 하며 참선을 하는 스님들에게 있는지를 결정하는 순간이였다. 이 판결에 불교계 뿐 아니라 엄청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

전국에서 비구스님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불법에 대처승은 없다’는 프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법원은 대처승의 손을 들어주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이였고, 전국승려대회 역시 불법적인 절차에 따라 개최됐으며, 여기에서 결의된 사항 또한 무효라는 것이였다. 금오스님이 주창해 일어난 불교정화운동이 중대한 위기상황에 처한 순간이였다. 이제 남은 것은 대처스님들의 반격이였다. 대처스님들은 불교정화운동은 비구승들이 이승만 정권과 결탁해서 진행한 사건에 불과하므로 모든 사찰을 분규 이전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판결이 대처승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에 격분한 비구스님 여섯명이 대법원원장 비서실을 찾아가 대법관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이 거절되자 6명의 비구스님들이 흉기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피가 낭자했다. 출동한 경찰과 격투가 벌어졌다. 조계사에서 단식을 하던 비구스님 400여명이 대법원으로 달려갔다.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경찰은 기마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스님들을 구타했다. 이때 사건으로 구속된 스님들이 24명에 달했다.

대법원이 대처스님들의 손을 들어주어 이제 비구스님들이 절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였을 때 이 국면을 전환할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계속>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