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전통성을 지키고 호국불교의 등불이 되고자”

왜색에 찌든 한국불교 바로 세우기 주도
전국 비구·비구니 대회 개최, 정화불사 본격화
이승만 대통령 ‘정화유시’ 발표
비구승 - 대처승 대립각 첨예화

1954년 8월 25일 불교정화를 위해 서울 선학원에 모인 스님들.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금오대선사다. <사진= ‘금오스님과 불교정화운동’>
1953년 6월 한국불교 선승들의 본부나 마찬가지였던 선학원의 조실로 추대된 금오선사는 큰 역사적 책임을 맡게 된다. 법정스님등이 거쳐갔던 선학원은 젊은 선승들의 집합체였다. 그들에게 금오선사는 청정수행자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였다.

조선총독부가 선승들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심심산곡으로 들어가 참선수행만을 해 온 금오선사를 젊은 스님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금오선사는 조선불교의 전통인 간화선의 수행법을 만공선사로부터 전승한 수행자라는 점에서 비구승의 유일한 모범이였다.

한편으로 선학원 스님들은 그런 금오선사가 큰 일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후에도 대부분의 사찰을 점유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사찰을 운영하고 있는 대처승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 금오스님을 꼽았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대립적 갈등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였다. 전통사찰을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은 한국불교계의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결혼한 스님들인 대처승들은 그들을 감싸주던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시대적 상황에 밀려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불교의 종권과 본거지인 중앙교무원을 장악하고 있었고, 전국 주요 사찰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비구승들은 전국적으로 300여명에 불과했지만 대처승들은 7,000명이나 됐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저항할수도 없었다.

대처스님들은 한편으로 금오스님을 크게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1953년 5월 전국사찰주지회의라는 큰 행사에 금오선사를 모셔 법문을 청하게 된다. 대처스님들도 금오스님을 출가 수행자 중에서도 가장 청정한 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금오선사가 법문 끝머리에 다음과 같은 깜짝 놀랄 제안을 한다.

“대처승들은 비구승들에게 참선을 할 수 있도록 사찰을 몇 개 내 주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공식제안한다. 비구승들이 수행할 사찰 18개를 꼭 내어달라”

스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처스님들이 크게 놀랐지만 그들은 스님의 제안에 순순히 따랐다. 대처승들도 해방 후 상황 변화를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처승들은 스님의 제안을 받아드리기로 하고 이날 전국사찰주지회의에서 결의까지 했다. 그러나 그뒤로 묵묵부답이였다. 결의까지 했던 내용이 백지가 되어버리고 조금도 구체적인 진척이 없었다.

금오선사는 대처승들에게 비구들이 청정수행할 사찰들을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비구스님들과 대처스님들의 갈등은 첨예해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선학원 조실 금오선사는 ‘한국불교정화운동’을 발의하게 된다. 1953년 6월 무렵이였다. 이 와중에 1954년 5월 20일 이승만대통령이 사찰을 방문하다가 일제의 잔재가 아직 불교계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불교정화유시’라는 것을 발표한다. 불교정화유시는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것이 정화유시의 주된 내용이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교정화유시’를 내린 것은 많은 계기가 있었다. 그가 서울 관악산의 한 암자를 찾았을 때였다. 그 암자의 법당에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과 황군의 무운장수를 비는 주련이 걸려 있었다. 또 충남의 관촉사를 찾았을 때에는 장발을 한 주지가 자신의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고 양복위에 장삼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흥천사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는 스님들이 기생파티를 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였기 때문에 불교계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목격하면서 일제잔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후 이대통령은 비구승을 대표하는 승려 5명을 경무대로 초청한다. 그때 참석한 비구스님들이 금오스님을 비롯해 효봉스님, 청담스님, 구산스님, 원허스님등이였다. 이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불교정화 의지를 밝히며 비구스님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당부했다.

1954년 5월 20일 이대통령은 한국불교의 ‘정화에 대한 유시’를 발표하게 된다. 한마디로 대처승은 절을 떠나라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대처스님들도 쉽게 물러날 일이 아니였다. 자신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대처스님측은 ‘정화유시는 비구측이 정권과 결탁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평을 내며 결연한 투쟁을 결의했다.

금오선사의 친필. 선승인 금오선사는 수려한 필체로도 유명하다.
결국 대처스님들은 1954년 6월 20일 긴급중앙종회를 개최하고 대책을 숙의하게 된다. 금오스님을 비롯한 선학원의 비구승 12명은 법복을 입고 중앙종회를 참관하게 된다. 그런데 중앙종회에 참석한 의원들의 모습이 참담하기 이를때 없었다.

법복을 입은 스님들은 없었고 형형색색의 일반인 옷과 양복이 태반이였다. 종회의장인 박성하 스님은 도저히 승려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장발에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였다. 불행하지만 당시 한국불교의 현실적인 모습이였다. 이런 스님들의 규모가 7,000명이나 됐고 이들이 전국 주요사찰을 몽땅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은 바로 그런 모습을 바꿔 보자는 운동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구승들의 기본적인 요구는 주요 삼보사찰(통도사, 송광사, 해인사) 정도를 선승들에게 내어 주라는 것이였다. 대처스님들도 이런저런 모양을 잡으려고 직지사, 동화사등 가난한 사찰 48개를 내어준다는 회의도 했으나 통 이행되는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때문에 일부 사찰을 할여한다는 말을 했으나 실제로 사찰을 인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금오스님을 비롯한 비구스님들은 예초에 삼보사찰만을 요구했던 것을 철회하고 불교 전체의 정화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제 우리의 각오는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왜색을 일소하고 승단을 청정하게 하며 도제양성과 수도생활을 진작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정화불사에 임하기로 한다’<한국 불교정화승단사 참조>

금오스님은 약 300여명에 불과한 비구스님들의 의지를 대외에 공포하기 위해서는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는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금오스님은 전국승려대회를 정화불사의 전초전이라고 생각했다.

전국에 급하게 통문을 돌리고 수좌들이 직접 비구스님들을 찾아가 뜻을 전하기 시작했다. 비구스님들을 한명이라도 더 모이게 하는게 급선무였다. 행여 참석하는 비구스님들이 적어버리면 정화불사는 유야무야 되어 버리고, 오히려 대처스님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 밖에 되지 않을 일이였다.

당시 노스님들을 모셔오는데는 교통수단이 불편해 특별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6.25 직후라 중군포교단이라는게 그때까지도 있었는데, 스님들에게 그 단복을 입게하고 무임승차로 서울로 올라오게 하기도 했다. 통영군 미래사에 있던 효봉 큰스님과 고성군 문수암에 있던 청담스님, 경남 남해군 욕지고에 있던 동산큰스님등이 노구를 이끌고 급히 서울로 모여들었다. 전국에서 수백명의 비구, 비구니(여스님)들이 서울 선학원으로 모여들었다. 한꺼번에 스님들이 모여들면서 선학원에 거쳐가 부족할 정도였다.

1954년 8월 24일, 드디어 제1차 전국 비구승․ 비구니 대표자대회가 선학원에서 개최됐다. 이 대회는 금오스님의 정화불사 의지로 촉발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였다. 전국대회를 계기로 언론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954년 8월 26일 처음으로 ‘대처승 반대 비구승 대회’라는 제목으로 큰 기사를 보도했다.

금오스님과 청담스님은 8월 28일 공부처장(지금 장관)을 만나 이승만대통령의 정화유시에 대한 감사문과 함께 건의서를 전달했다. 두 스님의 공보처 방문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은 계속돼 제2~3차 유시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9월 1일 교단을 정리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전국 불교도에게 드리는 선언문’이 전격 발표된다.

‘세계사는 현재 혼란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은 정신의 귀향처를 찾고 있다. 이러한 때에 세존이 와서 이러한 법을 깨치시고 널리 불법을 전해왔다.

한국의 불교전통은 몇몇 위대한 고승들에 의해 이여져 왔으며 세존께서 전한 불법을 이어받아 계율을 준수하고 진리를 탐구해 왔으나 밖으로는 36년 동안 일본의 침략으로 들어 온 왜색불교로 인해 한국의 전통불교가 짓밟혔다. 또한 광복한 지 무려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처승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들에 의해 왜색불교는 더욱 융성해서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해치고 있다.
 
이에 이러한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심산유곡에서 수도에 열중해야할 비구 비구니승들이 광도 중생을 위해 산 아래로 내려와 한국 불교의 전통성을 지키고 호국불교의 등불이 되기 위해 불교정화운동을 전해하는 것이다’

이 성명서는 비구승들의 각오였으며 정화불사의 첫 시발점이 됐다. 결국 제1차 전국 비구승 비구니승대회는 정화불사의 첫 시발점이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금오스님이 있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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