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수행자란 첫째도 참선, 둘째도 참선, 셋째도 참선이다

일제 창씨개명 끝까지 거부,  오직 참선 수행에 열중

금오스님이 1950년대 어느날 제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느 사찰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스님은 어느곳을 가든지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금오문중은 지금 조계종에서 가장 큰 맥을 형성하고 있다.<사진=금오스님과 불교정화운동>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조선불교 탄압은 매우 심해졌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에게 창씨 개명을 압박했고 선승들에게 조차 ‘황군위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일제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의 주요사찰이 모두 결혼을 한 대처승들이 주지를 맡게 했다. 금오선사에게는 이것이 눈뜨고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일제에 항거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였다. 그는 1940년 2월 조실로 있던 직지사를 나와 심산유곡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달랑 바랑하나를 들처메고 길을 나섰다. 그가 가는 곳은 강진에서 처음으로 출가했던 금강산 마하연선원이였다. 그러나 경북 김천에서 금강산까지 찾아가 도착한 마하연선원은 텅 비어 있었다. 공부하고 있어야 할 수좌들은 일본의 사찰령으로 아무도 없었다. 선원에 시주가 끊기고 먹을 식량 조차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초연한 선승들도 식량조차 없는 곳에서 도를 닦을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일제가 조선불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노리는 것들이었다. 전국의 사찰은 그런식으로 황폐해져 갔다.

금오스님은 발길을 백두산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때 일제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먹고 살길을 찾아 떠났듯이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찰은 모두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선승들이 도를 닦을 곳이 없어지자 백두산으로 올라간 스님들이 많았다.

백두산에는 만공대선사의 제자인 해암선사가 삼지연이라는 토굴에서 3년 동안 수생하고 있었다. 해암선사 역시 조선총독부의 간섭을 피해 수좌들과 함께 그곳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삼지연토굴에서 해암선사를 만난 금오스님은 다시 만주로 가서 수월선사를 만나고 다시 금강산 마하연을 거쳐 안변 석왕사로 갔다. 석왕사는 조선시대 무학대사를 위해 태조가 세운 절로 금오선사가 처음 출가해서 3년 동안 정진했던 사철이였다. 금오선사의 나이는 어느덧 49세가 됐다.
 
석왕사에 들른 금오선사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서 참선을 하는 스님들이 대부분 창씨개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렇게 해야만 국내에서 이렇게 참선할 공간이라도 찾을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금오선사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당시 승려들이 창씨개명을 한 것은 대부분 사찰의 주지를 맡기 위한 것이였으나 금오선사는 그런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후대 제자들은 이를 두고 “금오선사는 창씨개명이 민족을 팔어먹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은 선사의 민족에 대한 지조와 철저한 수행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금오선사의 나이 49세때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찰들은 이미 일제의 방침대로 왜색불교가 뿌리 내려 있었고, 일본의 사찰령은 미 군정에 의해 그대로 유지가 됐다. 해방은 됐지만 사찰은 일제강점기 그대로였던 것이다.

석왕사에 여장을 풀고 있던 어느날, 금오선사는 성왕사 조실인 환공선사로부터 한 청년을 소개받는다. 금오선사는 문하에 제자를 두는 것을 몹시 꺼려 했는데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청년의 돈독한 심신과 환공선사의 부탁에 쾌히 제자로 허락했다.

“집도 절도 가질수 없으며 처자와 자식을 가질수 없으며, 재물도 권세도 가질수 없으며, 그저 빈손인 것이 수행자의 삶인데 그대는 이 길을 가겠는가?”
“네 그 길을 가겠습니다”

청년의 답은 확고부동했다. 금오선사는 그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금오선사는 그 청년에게 월산(月山)이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청년이 그날밤 둥근 달이 산위에 떠 있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 금오선사는 청년에게 달월(月)가를 붙어 주었다. 이후 이 月자 돌림은 금오문중의 핵심으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것을 ‘월산성림’이라고 하는데 금오의 제자들중 월자를 붙인 스님들이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월주스님을 비롯해 월탄, 월조, 월태, 월담, 월용등 35명에 이른다. 금오문중은 현재 조계종 내에서 가장 큰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금오선사는 월산에게 승려로서 수행법을 전하고 그때야 비로서 제자를 받아들이면서 월산스님에게 참다운 수행자상이란 무엇인가를 일러주었다.

“참다운 수행자란 첫째도 참선, 둘째도 참선, 셋째도 참선이다. 그러므로 오직 참선수행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해방후 불교계 최고 선승 대우
망월사, 청계사, 칠불선원, 금산사
동화사, 선학원 조실맡아 활동

금오스님은 50세 되던 해 다시 금강산 마하연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 금강산 마하연에는 갈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미 3.8선이 그어져 남쪽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갈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강진에서 수개월을 걸어서 출가했던 마하연선원은 이제 새들만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곳이 되어 버렸다.

다시는 금강산에 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금오선사는 발길을 돌려 지리산 칠불선원으로 향했다. 3.8선 인근에서 지리산까지 여정은 참으로 긴 시간이였다.

금오선사가 생전에 지니고 다니며 사용했던 발우의 모습이다. 발우는 스님들의 식사 그릇이다.
금오선사는 51세 되던 1947년 지리산 쌍계사 조실로 있다가 인근 칠불선원으로 올라가 참선수행에 들어갔다. 칠불선원은 대은율사가 조선의 선맥을 전승하기 위해 기도를 했던 암자였다. 금오선사는 이곳에서 10명의 수좌들과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이곳 칠불선원의 용맹정진은 불교계의 전설처럼 이야기 되고 있다. 용맹정진에 들어가 얼마되지 않아 칠불선원의 공양거리가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사찰은 매우 가난한 곳이여서 먹거리가 부족한 곳이 태반이였다. 칠불선원도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수좌들이 칠불선원을 떠나려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금오선사가 수좌들을 불러 모았다. “그대들은 수도승이다. 어찌하여 한갓 배고픔으로 인해 이곳을 떠나려 하는가”

수좌들이 대답했다. “제 아무리 신심이 돈독하더라도 3달 동안 조석으로 끓일 양식이 없는 곳에서 견딜 방법이 없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였다. 아무리 심신이 돈독해도 배고픔을 참고 용맹정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금오선사가 묘안을 짜냈다.

10명중 절반은 용맹전진을 계속하고 절반은 거리로 가가 탁발을 해오자는 것이였다. 수좌들이 일제히 금오선사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칠불선원 수좌들은 몇 달을 더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금오스님이 다시 수좌들을 불러 모았다. ‘용맹정진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요구한 것이다. 이 각서에 서명하지 않은 수좌는 칠불선원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결국 대부분의 수좌들이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다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한국불교사에 찾아 볼수 없는 각오와 각서였다.

그러다가 지리산 칠불선원은 위기가 닥쳐 온다. 1948년 4월 3일, 금오선사의 나이 52세가 되던 해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지리산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들었다. 평온했던 산자락에 정치 바람이 불어왔다. 군경에 쫒기던 빨치산들이 들어오고 자연히 칠불선원도 경찰의 표적이 됐다. 밤에는 빨치산의 표적이 됐다가 낮에는 경찰들이 들이 닥쳤다. 도저히 참선을 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금오선사는 하는 수 없이 수좌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이후 금오선사는 다시 만행에 들어가 계룡산 백련사를 거쳐 목포까지 내려오게 된다. 1911년 1월 고향 강진을 떠난지 거의 41년만에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이다. 목포 정혜원은 목포역에서 내려 유달산 노적봉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사찰로 조계종 초대 종정이신 만암 대종사가 창건한 백양사 말사이다.

유달산에 오른 금오선사가 가까이 있는 강진땅을 그리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목포항에서 건너편 용당으로 오가는 철선은 보았을 것이다. 강진사람들이 목포를 오갈 때 반드시 탔던 철선이다. 지금은 영산강하구둑이 생겨 그곳으로 차량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이동 수단이 용당과 목포를 오가는 철선이였다.

그 사이 금오선사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미 해방을 전후한 우리나라 최대 선승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여러곳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금오선사는 그들을 제자로 삼고 月자를 붙여 법명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1953년 5월, 금오선사의 나이 57세때 그는 선학원 조실로 추대된다. 선학원은 당대 최고의 불교탐구 기관이였다. 만공(滿空)·용성(龍城)·혜월(慧月)·도봉(道峰)·석두(石頭)·남천(南泉)·상월(霜月) 등 여러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설립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정희·여운형·신명균·김법린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금오선사가 57세의 나이로 이처럼 호국과 호민의 뚜렷한 법통을 굳혀온 선학원의 최고 어른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 때 이곳에서 금오선사를 만난 범행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만난 금오스님은 마치 중국의 달마대사같은 얼굴을 하고 계셨는데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분이 선학원의 조실 금오선사인지 알았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태산이 앉아 있는 듯한 우람한 체구였는데 그에 비해 목소리는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웠다”

그때부터 범행스님은 자신의 소유나 다름없던 팔달사의 조실로 금오선사를 모셨다. 팔달사로 간 금오선사는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일제문화에 찌든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에 나서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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