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명 / 완도 금일고등학교 교사


지난 2009년 재현됐던 강진에서 개경에 이르는 청자뱃길 항로에서 탐사선이 진도 앞바다를 통과하고 있다.
강진의 고대 유적은 청동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주거지로 추측되는 군동면 파산리 유적과 83개소에 약 680여기의 고인돌의 분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고인돌 집단의 세력 기반을 중심으로 한 강진의 고대 문화권은 마한 시대에 이르러 활동 범위가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여겨지는 데, 이는 영산강 유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마한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알려진 옹관묘가 강진에서도 군동면 호계리 호동, 파산리 금곡, 나천리 시목, 풍동리 풍동·봉산 등지에서 발견된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강진은 마한에 이어 백제가 탐라를 복속시킨 무렵인 5세기 후반 경부터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는데 이때부터 강진 지역은 해로를 통한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정치·군사적인 중요성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에도 도무군이 양무군으로, 동음현이 탐진현으로 각각 명칭만 바뀌고 백제시대와 큰 차이 없이 행정 영역을 유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영산강이나 서남 해안을 낀 지리적 유사성을 지닌 강진, 나주, 무안 등이 급성장을 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통일신라시대에 한반도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육지와 도서 지방은 물론 한·중·일을 연결하는 중요 거점으로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고대 해로는 장보고가 완도읍 죽청리와 장좌리 일대에 청해진을 설치하면서(828년)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고려 시대에 강진군 대구면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고려청자 문화의 발흥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해로를 통한 문화 교류는 마랑포구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한반도와 제주도 등 도서 지방을 연결하면서 군마 반입 등 국내 해상 교통의 한 거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서 중기에 걸쳐 강진의 행정 관할 구역은 몇 차례의 변화를 거듭하다 급기야 완전히 독립된 행정 영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 후 1172년(명종 2년)에 이르러 영암에 속해 있던 도강현이 다시 독립되면서 감무(監務)가 파견되는데 이때는 고려 무신집권기가 시작되던 시기로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려청자 문화가 전성기를 맞게 되고 월남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며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 민중신앙적인 결사운동이 일어나 강진의 문화적 지위가 크게 상승하게 되었는데 이점은 반드시 당시의 이 지역이 가진 정치·경제·문화적 기반과 함께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다.

최근 강진청자축제의 부대 행사로 열린 ‘청자 한․중․일 국제학술토론회’ 등에서 강진의 청자가 중국 월주요에서 유입되었다기보다는 중국 북방의 도자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의 해로와 강진 청자의 관련성을 연결 짓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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