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 “김정일 세습 반대하다 비참하게 숙청돼”

정전협정 대표단 동료 2명도 모두 숙청
60년대에는 아들 난융(南勇) 중국피신설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2년 2개월 동안 북한을 대변했던 사람들이다. 남일장군(가운데)은 70년대 초반 김정일 권력세습을 반대하다 숙청돼 사망했고, 이상조 소장(남일장군 바로 우측)은 1956년 소련대사로 부임후 사실상 망명했다. 제일우측의 장평산 58년 구테타음모를 뒤집어 쓰고 김일성에 의해 사형당했다.
70년대 초반 어느날의 일이다. 광주의 어느 술집에서 강진사람과 광주사람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때 광주사람이 강진사람에게 “강진 출신중에 큰 인물이 있는데 그것을 아느냐”고 했다. 강진사람이 “그게 누구냐”고 묻자 그 사람은 “남일장군이라고 그 사람이 강진사람인데 인물은 인물이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며칠 후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북한 인민군 대장을 ‘큰 인물’이라고 치켜올린게 정보기관에 들어갔던 것이다.

북한에서 영웅칭호를 받던 남일장군은 이렇듯 남한사람들에게, 특히 고향 강진사람들에게 거론조차 되기 어려운 사람이였다. 그래서 문중도 그를 멀리했고, 그의 후손들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싫어했다.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강진을 떠났다.

올초에는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외할아버지 묘비석이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런데 며칠후 그 묘비석이 어디론가 사려져 버렸다. 묘비석을 치워버린 사람들은 문중사람들이였다. 후손들이 김정은 위원장 외할아버지와 관련해어떤 관심을 받기도, 어떤 갈등에 휩쌓이기도 싫었던 것이다. 요즘에도 그런 피해의식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필자가 '강진인물사' 열 번째 인물로 ‘북한의 전쟁영웅 남일장군’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농담으로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 “잡혀가지 않고 아직 돌아다니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마다 “남일은 이제 고인이다. 역사적 인물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는 김정일 세습체제를 반대하다가 숙청된 것으로 탈북자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강진출신인 그를 조명하는 일은 역사적인 작업일 뿐이다”고 말하곤 했다.      

다시 남일장군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남일장군은 2년 2개월에 걸친 정전협상과정에서 우리쪽 신문에 100여회 이상 등장한다. 본지가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보도된 남일장군의 동정을 파악해 본 결과 협상이 시작된 51년 7월부터 53년 7월까지 그의 이름이 120여회나 등장한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른 신문까지 합하면 그는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이 김일성이란 이름보다 자주 접하는 북쪽 사람이였다. 그에 대한 관심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계속된다.

정전협정이 체결(7월 27일) 된 후 불과 8일만의 일이었다. ‘2일밤 평양방송에의하면 북한괴뢰집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는 한국휴전회의 공산군측의 수석대표 남일대장을 북한괴뢰의 외상으로 임명했다’는 큼지막한 기사가 각 신문의 1면을 장식한다. 정전협정이 마무리되면서 전쟁이 끝나자 마자 우리쪽으로 하면 외무부장관에 임명된 것이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정전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남일장군은 외무상으로 제격이였을 것이다.

남일장군의 아들로 추정되는 중국의 전 축구협회 임원 난융
당시 남한 사회는 종전 후 북한의 권력구도 변화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정전협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나돈 소문이 박헌영 외무상이 숙청됐다는 것이였다. 남일장군의 갑작스런 외무상 임명은 박헌영의 숙청이 기정사실화되는 순간이였다.

훗날 정확히 밝혀진 것이지만 외무상이였던 박헌영이 체포된 것은 1953년 3월 11일이였다. 8월 6일에는 국가를 배반한 죄로 출당조치를 당했다. 1955년 12월 3일에는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의 두목 내지는 공화국전복 기도”혐의로 기소한데 이어 14일에는 박헌영을 단죄할 특별재판소가 설치된다. 이어 하룻만에 사형과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는다. 박헌영은 유폐됐다.

이후 1956년 박헌영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 7월 19일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 중이던 김일성이가 급거 귀국하더니 그날 저녁 내무상인 방학세에게 박헌영의 처형을 지시했다. 방학세를 보자 죽음을 직감한 박헌영은 “여러가지 절차 필요 없이 간단하게 처리해 달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자기의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자식을 소련으로 보내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총살을 당했다. 방학세가 직접 박헌영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두 번씩이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한다.<김중위. 박헌영도 장성택식 죽음. 중부일보 12월 24일>

76년 3월 8일 의문의 교통사고사 
1959년 외무상에서 물러나며  핵심권력에서 밀려

이때가 바로 대구 수동출신 공산주의자 윤순달도 함께 숙청을 당한 시기다. 윤순달은 1934년 20세의 나이에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원으로 활약했고, 26세때는 경성콤그룹 전남책임자가 된다.  1949년에는 박헌영 계열로 승승장구하면서 사단장급에 해당되는 남로당 조직부장 대리가 됐고, 1952년에는 차관급에 해당되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연락소부소장까지 올랐다. 북한쪽 입장에서 보면 당과 인민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람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계파를 숙청할 당시 체포돼 오랜 형을 선고받고 평생 교도소에서 삶을 보냈다.

이 반해 남일장군은 김일성의 충복으로서 외무상에 발탁된데 이어 이를 바탕으로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평화회담에서 북한측 수석대표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6.25 정전협정은 종전이 아닌 정전이라는 불완전한 합의였다. 이 조항에 따라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다루는 정치회담이 열렸던 것이다. 이 회담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16개국 중 15개국, 중국과 북한이 참가했으며 남한에서는 변영태 외무장관, 북한에서는 남일 외무상이 각각 참석했다.

남일은 당시 제네바 국제평화회담에서 재일한국인들을 북한 공민권자로 인정한다는 공식발언을 해 화제가 됐다. 승승장구하던 남일에게도 1956년 큰 시련이 찾아온다. 1956년 김일성이 원조 요청차 구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하는 틈을 타 연안파(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입북한 공산주의자들)와 소련파가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쿠데타는 김일성 친위세력에 의해 제압되고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남일장군은 구테타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의심받았다. 이때 남일장군은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지를 확인시키면서 생존에 성공했다고 한다.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숙청은 50년대 후반을 거쳐 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6.25당시 중공군 사령관이였던 팽덕회가 문화혁명당시 숙청돼 홍위병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다. <사진=중국포털 바이두>
이때에 가족의 위협을 느낀 남일장군은 아들을 중국으로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향신문이 2006년 12월 5일자에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 축구협회 난융(南勇·51) 부회장이 남일장군의 아들이라는 풍문이 베이징(北京)에서 나돌았다. 한 소식통은 ‘소련파’인 남일 대장이 50년대 김일성 주석의 친중국계 연안파와 소련파 숙청으로 어려움을 겪어 하는 수 없이 아들을 중국에 보냈다고 전했다고 이 신문은 적었다.

난융 중국 축구협회 부회장은 1962년생으로 학창 시절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를 지냈고 선양(瀋陽) 체육학원(체육대)을 졸업한 뒤 중국 축구협회에 투신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방한한 바 있다. 난부회장은 지난해 3월 중국 축구협회가 세야룽(謝亞龍) 수석 부회장 체제(중국 축구협회 회장은 국가체육총국 국장이 겸임)로 전환하면서 제2부회장으로 승진, 각종 리그 및 심판, 기술 담당 부회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남융은 2010년 적발된 승부조작과 관련해 뇌물수수혐의로 체포돼 중국인민법원에서 징역 10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중국 축구계내의 뿌리깊은 뇌물수수의 희생양이었다는게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분석이었다.  

난융은 뇌물사건이 터지기 전 남일 장군의 아들이라는 풍문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그는 일부 인사들이 풍문을 확인하려들자 “북한은 아름다운 곳이며 산과 물이 있고, 자연 경관이 빼어나지만 한자는 많이 없다”며 즉답을 피한 채 말을 돌렸다는 후문이다. 남일장군은 자신의 고향에 대해 아들에게만은 말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남일장군의 아들이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그의 입을 통해 강진 병영의 이름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남일장군은 57년 9월 외상겸 부수상에 올랐으며 66년 9월에는 철도상이 됐다. 또 72년에는 정무원 부총리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고개돌려 보아야 할 것은 공산국가의 전략인지, 아니면 민족정신의 발로인지 모르지만 남일장군은 요직에 있으면서 줄기차게 남북회담과 군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남일장군은 외상시절이던 54년 제네바 회담에서 국제감시하에서 남북통일선거를 하자고 주장했고 1년 이내에 남북한 병력을 10만 이하로 감축할 것, 남북한 간에 경제 및 문화교류를 위한 조선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57년 8월 평양방송을 통해 ‘한국통일문제에 관한 확대회담이 관련국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야 한다’고 남쪽에 제안해 왔다. 57년 9월 부수상겸 외상으로 승진이 되면서 그는 북한내 권력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남일은 2년 후인 59년 10월 외상에서 해임되고 부수상 직책만 갖게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때부터 남일장군이 서서히 권력에서 밀려났다고 분석했다. 당시 신문들은 ‘남일장군이 외상에서 밀려난 것은 김일성이 마지막 정적을 제거한 것’이라고 해설했다.<동아일보 59년 10월 28일자>

그렇다고 남일장군이 북한의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였다. 핵심요직에는 있지 않았지만 부수상과 공산당정치국원의 지위는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의 팽덕회(彭德懷)처럼 대중의 눈으로부터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팽덕회는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한국전에 파병된 중공군 총사령관이였으며 정전협정에서 중공측 대표로 서명한 사람이였지만 숙청당했다.

그럼 정전협정에서 남일장군과 함께 대표로 나왔던 북한 장성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정전협정에 나온 북한 대표단은 남일장군, 이상조, 장평산등이였다.

중국 남경군관학교 출신인 이상조는 1945년에 입북하여 6.25 때에는 인민군 정찰국장으로 휴전협상에 참여했다. 정전후 1956년 당 중앙위원 후보위원에 올랐던 그는 소련의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하지만 곧 김일성 개인숭배 운동에 반기를 들어 본국 소환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소환에 불응하고 소련에 망명함으로써 오늘까지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정치학 박사로 변신한 그는 1989년 2월 소련을 방문한 연세대 최평길 교수에게 김일성의 계획적 남침을 폭로하면서 증거자료들을 공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가족상봉차 서울을 방문하여 <북한은 김일성 사상으로 최면이 걸린 이상한 나라>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장평산은 1915년 평남산으로 중공 팔로군 대대장을 지냈으며 6.25동란 시에 소위 ‘조선의용군’으로 북한에 일찌감치 들어왔지만 곧 지휘관이 부족한 북한군에 편입되어 휴전협상 시에는 북한군 1군단 참모장이었다. 6.25 후에는 중장으로 진급되어 평양수비대 사령관이 되었고 1957년에는 인민대의원으로까지 승승장구하는 듯하였으나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를 비판하다가 1958년 소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쿠데타 음모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다. 남일장군은 이 시기를 전후해 자신도 언제든지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들을 중국으로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북한은 1966년 10월 집단지도체제로 들어서면서 남일장군이 차지하고 있던 당부위원장직을 없애버렸다. 이때 남일장군은 지도부에서 배재됐고 직책도 부수상에서 철도상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동아일보 66년 10월 14일자 참조>1972년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으나 정무원의 기능이 많이 떨어진 시기였고, 정무원 부총리는 6명이나 됐다.

1976년 3월 9일자 국내 언론에 ‘북괴부수상 남일사망’이라는 짧막한 기사가 나온다. 그의 나이 64세때의 일이다. 신문들은 평양방송을 인용 보도하면서 ‘남일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으며 불의의 사고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며칠 후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드차이나 모닝포스트지가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남일이 김일성 사무실 창밖으로 밀쳐져 살해됐거나 그의 승용차에서 떠밀려 죽은 것으로 전해졌다’는 증언들이 잇따라 나왔다며 이 신문은 ‘남일은 김일성이 죽였다’는 커다란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탈북자들 사이에서 남일이 김일성에 의해 살해 됐다는 증언들이 잇따라 나왔다. 2013년 12월 10일자 <강진일보>에 게재한 내용이지만 당시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고위 탈북자 A씨에 따르면 1976년 2월 남일 당시 정무원 부총리는 평남 안주의 남흥청년화학공장을 시찰한 뒤 관용 벤츠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안공항 부근 도로에서 군용 트럭과 충돌했다. A씨는 “당시 사고 현장에 다녀온 사회안전부(경찰) 교통조사과 부과장의 비밀 보고를 받았는데 사고가 의혹투성이였다”고 말했다.

A씨는 “당시 김일성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김정일은 이복동생 평일을 지지하는 남일을 눈엣가시로 여겼다”며 “자신의 수족인 호위2국을 동원해 남일을 살해한 것”이라고 말했다.<자유주의진보연합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vivamd?Redirect=Log&logNo=10115479335 인용>

1,000만명이 죽은 독소전쟁에서 살아남아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참모총장, 정전협정 북한대표, 북한외무상, 부수상등 화려한 경력으로 점철됐던 남일장군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북한정권이 오늘날 세계유례없는 3대 세습을 이루기까지 그들을 위해 충성했던 사람들을 헌신짝 처럼 던진 것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또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아직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북한에서 한때 전쟁영웅으로 대접받은 남일장군을 조명할 수 있는 큰 근거이도 한 부분이다.  훗날 그에 대한 조명이 좀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되길 바라면서 남일장군에 대한 연재를 마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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