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전식 후보 여유 있게 1위 5선 성공
9대때 타의에 의해 불출마했던 윤재명 후보 3선 안착

윤재명 의원
길전식 의원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됐다. 10대 총선도 9대 총선처럼 선거구당 2명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선택했다. 77개 선거구에서 154명을 선출했다. 지역구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은 68명을, 신민당은 61명을, 민주통일당은 3명을 각각 당선시켰다. 무소속 당선자는 22명.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같은 해 12월 21일 회의를 열고 박정희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의원후보 77명의 유신정우회(유정회) 의원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모두 231명의 의원을 선출한 10대 국회는, 다음해인 1979년 3월 15일 개원했다.

10대 국회 지역구 의원의 법정 임기는 6년(유정회 의원 3년)이었으나, 실제 임기는 역대 국회 사상 세 번째로 짧은 1년 7개월 16일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1980년 10월 27일 국회 기능을 정지시키고 국회 권한과 기능을 대신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출범시켰기 때문이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11대 국회 개원 전인 1981년 4월10일까지 5개월여 동안 활동했다.

10대 국회는 짧은 임기동안 정치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YH여공 신민당사 점거농성 및 강제 해산(79.8.11)을 비롯해 ▲박정희 대통령 시해(79.10.26) ▲제10대 대선, 최규하 당선(79.12.6) ▲5·17 비상계엄 확대 및 김대중 선생 등 정치인 연행(80.5.17)▲5·18 광주민주화운동 발생(80.5.18) ▲제11대 대선, 전두환 당선(80. 8.27) 등이 있었다.

선거 책임자들 설악산이나 제주도 반강제 여행 보내고
타이어 빼버린 대형트럭 선거사무실 입구에 세워놓기도 

10대 총선 때 전남 제8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에서 금배지에 도전한 후보는 모두 7명. 이 가운데 정당후보는 길전식(吉典植·54, 공화당) · 황호동(黃鎬東·42, 신민당) · 오석보(吳石堡·39, 민주통일당) 후보 등 3명이었고, 무소속 후보는 윤재명(尹在明·46) · 이선동(李先東·45) · 이정채(李正彩·29) · 최수영(崔洙泳·35) 후보 등 4명이었다.

선거전은 정당소속인 길전식 · 황호동 · 오석보 후보와 친여(親與) 무소속 윤재명 후보, 친야(親野) 무소속 이선동 후보가 치열한 5파전을 벌였다.

선거전이 종반에 들어서면서 길전식 후보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등으로 확실한 우세를 보였다. 오히려 황호동 · 윤재명 · 이선동 · 오석보 후보 등 4명의 2위 다툼이 더 관심을 끌었다. 2위권 후보들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금메달’보다는 ‘은메달’로 국회에 진출해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길전식 후보는 집권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4선(6~9대) 의원 출신답게 전국 최다 득표를 목표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는 읍·면 단위는 물론 마을 단위까지 당원교육을 완료하고, 군별 공약을 20개씩 제시해 지역구민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황호동 후보는 현역 의원(9대국회) 신분으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역도경기에 출전, 은메달을 획득해 국위를 선양한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고 정부 실정을 비판하면서 표밭을 누볐다. 그는 30여명의 면책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조직 확대를 독려하기도 했다.

윤재명 의원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던 충남 당진의 ’삽교천 준공식’행사에 참석했다.(사진 오른쪽부분 흰색 자료를 들고 있는 이가 윤재명 의원)
윤재명 후보는 선거 직전에 무소속 출마를 위해 공화당을 탈당, 9대 국회 당시 유정회 의원 추천 약속을 어긴 길전식 후보와 한판 대결을 벌였다. 길 후보는 친여 성향 표를 잠식해가는 윤 후보를 견제했다.

윤 후보의 주요 선거 책임자들을 설악산이나 제주도로 반강제 여행을 보내기도 했고, 영암에서는 타이어를 빼버린 대형트럭을 선거사무실 입구에 세워놓아 기동력을 잃게 하기도 했다.

이선동 후보는 주로 완도지역 주요 섬들을 순회하면서 “완도 출신 의원이 있어야 어민권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논리로 가장 유권자가 많은 완도군민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선거 결과, 예상대로 길전식 후보가 여유 있게 1위로 당선되었고, 2위는 9대 총선 때 타의에 의해 불출마했던 윤재명 후보가 차지, 마침내 3선에 성공했다. 길 후보는 유효투표수(18만8천336표)의 39.65%인 7만4천668표를 얻어 5선 의원이 됐다. 윤재명 후보는 유효득표수의 16.55%인 3만1천167표를 득표해 2위로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1위와 2위간 표 차이는 4만3천5백여 표나 됐다.

이선동 후보는 2만8천244표(15%)를 얻어 3위로 낙선했는데, 2위 당선자와의 표 차이는 불과 2천9백여 표. 제1야당 후보로 출마해 재선 성공이 점쳐졌던 황호동 후보는, 예상보다도 저조한 2만7천687표(14.70%)를 득표해 4위를 기록했다.

이밖에 오석보 후보는 유효투표수의 7.64%인 1만4천386표를 얻어 5위를 기록했고, 최수영 후보와 이정채 후보는 각각 8천947표(4.75%)와 3천237표(1.72%)를 얻어 6,7위를 기록했다. 

<전남 제8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 제10대 총선 입후보자명단>

이름

(나이)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길전식

(54)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 46

국회의원

연세대 문과 졸, 육사 8기 졸,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6~9대 의원(4선)

민 주

공화당

74,668

(39.65%)

황호동

(42)

서울시 강서구 목동 318-136

국회의원

강진농고, 고려대 경제과 졸, 신민당 전남 제8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중앙 당무위원, 9대 의원

신민당

27,687

(14.70%)

오석보

(39)

강진군 군동면 금강리 286

농업

건국대 정외과 졸, 전국 기독교청소년절제회 회장, 재경전남대학생학우회장, 민주통일당 전남8지구당위원장

민 주

통일당

14,386

(7.64%)

윤재명

(46)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2

 

목축업

고려대 문과 졸, 7,8대 의원, 공화당 원내부총무, 재경문태중고교 동창회장

무소속

31,167

(16.55%)

이선동

(45)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363

 

수 산

제조업

고려대 법과 졸, 신민당․민정당․신한당 완도지구당 위원장, 완도군미역가공협회장

무소속

28,244

(15.00%)

이정채

(29)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1동 258-31

 

언론인

단국대 법과 졸, 재중완도군학우회장, 시사통신사 경제부기자, 동남아 경제계 시찰

무소속

3,237

(1.72%)

최수영

(35)

 

서울시 도봉구 미아4동 138-32

 

회사원

신일공업 대표, 신민당 중앙당 상무위원, 신민당 중앙당 정책위원

무소속

8,947

(4.75%)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80년 신군부 정권장악 현역의원들 줄줄이 역사속으로
윤재명의원 전군미역국먹기운동 협조요청하기도

장흥 출신인 길전식 의원(1924.10 ~ 2011.12)은 10대 총선에 당선돼 5선의원이 됐다. 패배 기록이 한 번도 없이 6대 총선 부터 내리 다섯 번이나 당선됐다.
 

승마애호가이자 대학시절 승마선수였던 길전식 전의원이 1983년 8월 승마협회 간부들과 종마를 구입하기 위해 방미했다.(좌측에서 두 번째가 길전식 전 의원)
길 의원의 의정활동과 관련한 눈에 띄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공화당 사무총장이란 핵심당직자로서 활동한 자료들은 수두룩하다. 지역에선 ‘길전식 국회의원’보다 ‘길전식 사무총장’이란 호칭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공화당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을 8년간이나 맡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내 절대 권력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었다.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길 의원의 ‘승률 100% 성공신화’는 막을 내렸다. 그는 전두환 등 ‘고약한 후배군인들인’ 신군부에 의해 정치규제자로 묶이자 아예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전념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 선양사업. 그는 민족중흥회 회장을 맡아 ‘박정희 정신’을 전파하는데 주력해왔다. 지난해 12월 21일 사망하기 전까지도 왕성하게 대외활동을 했다. 또 매년 10월 26일이면 박정희 대통령 추도식 행사를 개최해왔다.  

길 의원은 사망 한 달 전인 지난해 11월, ‘고 박정희대통령 정신문화 선양회’를 발족했다. 이 단체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구성중인데, 올 12월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

연세대를 졸업한 길전식 의원은 특이하게도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했다. 그는 연세대에서 말을 타는 승마부 학생이었다. 1949년 육군 기병대대가 창설되면서 군관계자가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군대에 입대하라”고 권유하자 육사 8기로 입학했다. 육사 정규 8기생들은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지만, 길 의원 등 대학 승마부원들은 2개월만 교육을 받고 사관후보생으로 활동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정규 육사 8기생이었다.

도암면 만덕리 출신인 윤재명 의원(1931.11.5~ )은 7,8대 총선에 이어 10대 총선에 당선돼 3선에 성공, 중진 정치인으로의 발판을 다졌다. 그는 6년간의 정치공백을 극복하고 무소속으로 당선돼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10대 국회 개원에 앞서, “무소속으로는 지역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을 ‘팽’시켰던 공화당에 다시 입당했다.

국회 농수산위에서 의정활동을 했던 윤 의원은, 농어민 소득증대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미역이나 버섯 등을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수출창구를 마련하는 등 판로개척에 나서기도 했고,  완도 미역의 경우 국방부에서 전군이 ‘미역국 먹기 운동’을 벌이도록 국방부에 협조요청을 한 적도 있었다.

윤 의원은 1979년 10월 26일 낮 충남 삽교천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고 상경했는데, 그날 저녁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의 서거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신군부의 등장은 윤 의원의 정치생명 단축으로 이어졌다.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윤 의원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정치규제를 풀자, 12대 총선(85년2월)때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정계를 은퇴한 후 학원연합회 회장과 한일문화친선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길전식 의원의 9대 국회 때 정치행적이나 일화, 윤재명 의원의 7,8대 국회 때 정치행적이나 일화 등은 이미 소개했음. 강진일보 홈페이지 참조.)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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