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무덤 ‘전방후원분’,해양교류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강진, 해남, 영암등에서 발견되는
일본식 무덤 ‘전방후원분’
해양교류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일본식 무덤이다’
지자체․ 학계도 소극적 태도

함평군 손불면과 신광면이 교차되는 떼등이라 불리는 낮은 구릉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역시 전방후원분이다. 전체 길이가 70m 내외이고 높이는 약 5m 정도이다. 구릉의 장축방향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원부는 구릉 위쪽에 해당하고 방부는 구릉 아래쪽에 해당한다
강진과 해남, 영암등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들은 어떤 형태로든 일본문화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역사가들로부터 애써 외면당해 왔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전방후원분이 전형적인 왜식(倭式) 고분양식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에서 왜식 토기가 출토돼 이 무덤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학계의 우려가 컸다.

80년대 초반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10기 이상이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영산강 일대를 지배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의견을 함께하면서도 영산강 일대에서 출현한 이유와 그 주인공이 누구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여왔다.

우리측은 전방후원분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백제의 토착세력이거나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가 회귀한 한반도인들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일본은 그 주인공이 당시 한반도에서 정치세력을 형성했던 일본계의 이주 정착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아직도 이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영암을 비롯한 영산강 일대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고분군 유적이나 각종 문화유산을 조명하는 일이 뒷전에 밀리게 됐다. 자칫 일본의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일대의 문화재 복원과 재조명에 정부와 역사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전방후원분을 해양교류사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자국의 이익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역사적 교류사의 관점으로 관심을 확대해 나가자는 것이다.

실제 영암 출신의 왕인박사가 5세기경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한 것도 순수한 교류사적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오늘날 한․ 일 두 나라가 왕인박사를 역사적 인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 6세기인 529년 조성된 백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시대 유행했던 벽돌무덤 형태로 축조된 것도 순수한 문화사적 교류의 영향으로 봤기 때문에 오늘날 중요한 백제문화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백제땅에 남조시대 벽돌무덤이 있는 것을 남조가 백제를 통치한 흔적으로 접근했다면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충남 공주시 일대에서 발견된 중국 남조시대 벽돌무덤은 4기에 달하고 있다.

전방후원분의 역사를 연구해 온 충남대 박순발교수(고고학)는 “20년 전과 달리 전방후원분을 바라보는 우리 학계의 시각도 그동안 많이 성숙해졌다”며 “영산강 전방후원분에 대한 진실은 앞으로의 연구 진척과 함께 한·일 양국이 근대 역사학의 산물인 민족주의를 떠나 교류사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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