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영동리 고분에서 1천500년전 일본인 유골 발굴
함평 신덕고분 미스테리도 궁금... 그 때 영산강유역에는 무슨일이 있었을까

369년 침미다례가 백제 근초고왕으로부터 패한 후 마한은 완전히 멸망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는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나주시의 반남면과 영암의 시종면등에 백제와는 전혀 다른 묘제문화가 발전한 것으로 봐서 백제로부터 독립된 나라가 여전히 존재 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초대형 옹관묘가 그것이다. 백제의 분묘양식은 이 지역에서부터 6세기 후반부터 발견되고 있다. 다시말해 369년 침미다례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는 약 200여년 동안 마한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백제가 마한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주며 느슨하게 통치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와중에 축조된 것들이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다.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고분은 일본문화와 관련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모양이 많이 파괴되어서 무덤의 형태가 전방후원분인지 정확치 않지만 이곳에서는 특이한 유물이 나왔다. 2005년 이곳 주민이 자기 소유 대나무 숲을 밭으로 개간하던 중에 석실(石室)이 노출됨으로써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2005년 한 주민이 밭을 개간하다 발견된 나주시 영동리 고분에서는 1천500년전 인골이 23구 발굴됐는데 이 인골의 DNA를 분석한 결과 일본인과 비슷한 유골인 것으로 나타났다.
동신대박물관이 2007년초까지 3차에 걸쳐 연차 발굴을 벌였다. 영동리 고분의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지만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1천500년전 유골이 무려 23구나 발견됐다는 것이다. 두개골은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형질분석과 DNA분석이 가능했다.

고분 유골의 DNA를 분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였다. 인골의 주인공은 신라, 백제, 가야인과 차이가 있었고 조선인들과도 달랐다. 놀랍게도 유골의 DNA는 현대 일본인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역사학계에 함평군 신덕고분 발굴 미스테리란 우화가 있다. 함평신덕고분 역시 전방후원분이다. 이 고분은 1991년 3월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지 실측조사를 하다가 도굴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같은 해 6월17일 이후 7월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함평 신덕리 고분은 도굴 피해를 보긴 했지만, 나중에 그 도굴품 중 상당수를 회수한 데다 수습 유물 또한 만만치 않아 조사가 이뤄진 전방후원분 7곳 중 가장 많은 성과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신덕고분 발굴성과는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체적인 공개가 없다. 다만 광주박물관은 지난 95년 '함평 신덕고분 조사개보'라는 '행정보고서'만을 작성해 관계기관에 배포했을 뿐이며 이조차 '대외비'로 묶어 놓았다.

박물관이 당시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일본관련 유물이 지나치게 많이 나와서 그랬을 것이라는게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언제든지 보고서를 공개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에서 5~6세기에 걸쳐 일본계 문화와 인골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 전방후원분은 누가 무엇 때문에 축조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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