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큼 고생하지 않은 사람 있었나... 우리때는 다 그랬다

송완종 어르신이 자신이 살아온 80년 인생을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송 어르신은 낙천적인 성격이여서 모든 것을 웃음으로 수렴하는 듯 했다.
해방, 6.25, 새마을운동
그 때 힘들었지만
참 열심히 살았지

재산은 없다
자식들 커서
후회도 없다

30년대에 태어나 40, 50년대를 거치고 60, 70년대를 지나 80, 90년대로 들어온 사람들, 그들의 삶은 한국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스며있다. 누구 하나 그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유명한 기업인에서부터 이름없는 촌로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우리사회에서 한 평생을 살았다.

슬픈일, 힘들었던 일, 괴로웠던 일... 그리고 종종 찾아왔던 웃음웃던 시절들. 그런데 언뜻 거울을 보니 팔순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틀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또 한번 웃기도 하고, 한편으로 삶을 자조하면서 되도록 재미있게 살자고 다시한번 웃어 본다.

신전면 송완종(80) 어르신 역시 그런 사람이다. 30년대 중반에 태어나 그토록 가난했던 유년을 겪었고, 6.25때 형님이 행방불명됐다. 60, 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90년도에는 이농을 해서 서울생활도 해봤다.

서울생활 7년만에 다시 농촌으로 돌아온 것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근근히 모았던 재산은 노부부가 먹을 식량 나올 것만 남기고 자식들을 위해 모두 바쳤다.

70세가 넘어서면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면소재지 복지관에 나가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예도 어려웠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이 한문을 붓글씨로 쓴다는게 이만저만 복잡한 일이 아니였다. 10년을 그렇게 배웠다.

작은 작품들이 하나둘 모아졌다. 80을 코앞에 둔 어느날 이것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전시회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시회는 유명한 예술인이나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날 결심을 했다. 3녀1남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시회를 해야것다. 니들이 돈 좀 내라”

송완종 어르신이 전시회를 찾은 임병윤 신전면장(좌에서 두번째), 정봉심 여사 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열세살 때 일이다. 해방이 되고나서 한창 좌니 우니 마을이 시끄러울 때였다. 해남군청에 다니던 큰형님이 친구가 어떤 서류를 줘서 거기에 서명을 한게 화근이였다. 형님은 어느덧 남로당 당원이 되어 있었다. 난리가 났다.

순경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형님을 체포해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형님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냥 사라진게 아니였다. 그때 돈으로 3천원이란 지금으로 따지면 30억원이 넘을 돈이였다. 날마나 순경들이 마을앞에서 서성거렸다. 군청에서는 곧바로 재산을 압류했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

몇 년 후 한 노인이 찾아왔다. 인천에서 왔다고 했다. 아버님은 그 사람이 형님이 인천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양아버지를 삼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님이 그 사람을 설득해서 형님있는 곳을 파악했다. 형님을 설득했다. 자수해서 죄를 씻고 고향에서 살자고. 그래서 형님이 그날밤 아버님과 함께 고향마을로 내려왔다. 다음날 자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누가 지서에 신고했는지 그날밤 순경들이 들이닥쳤다. 형님은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다. 몇 년간 모은돈을 몽땅 뇌물로 받쳤다. 다행히 2년형이 선고됐다. 목포에서 1년의 형을 살고 있을때였다. 이제 1년만 형을 살면 형님은 출소였다. 그런데 다음해 6.25가 터졌다. 그후로 형님을 영원히 찾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부가 좌익머리를 쓴 사람들은 모조리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이였다.

아버지는 “그 때 니 형님을 그냥 인천에서 살게 내 버려뒀어야 하는데...”하고 평생 후회를 했다. 송완종 어르신은 “전쟁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정말 몰랐다”고 회고했다.
그후로 송완종어르신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옥천방앗간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발통기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그의 슬픔은 군대를 막 제대해서 찾아왔다. 제대 1년 전 결혼식을 올렸다. 제대 후 강진의 정미소에 취업을 했다. 발통기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방앗간에 취업이 됐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 어느날, 기별이 왔다. 부인이 분만도중 숨졌다는 것이였다. 아이도 얼마되지 않아 떠나갔다. 그후로 해남 북평면, 좌일면등에서 방앗간 생활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가장 슬픈 시간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다시 32세때 찾아왔다. 현재의 부인과 함께 결혼을 하면서 노 부모님을 모시고 신전으로 이사를 왔다. 방앗간을 다니며 마련한 일곱마지기의 논을 팔았는데 빚을 갚고나니 두마지기 돈만 남았다. 그 돈으로 수양리에 오두막집을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조그만 논을 구입했다. 근처의 송씨 문중의 논도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문중의 산을 개간해서 뽕나무를 심고 누애를 키웠다. 일꾼도 한명 고용했다. 당시에는 일꾼이 있으면 큰 부자소리를 듣는 시절이었다. 문중 제각에 살면서 30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예순을 넘기자 농사를 짓기가 힘들었다. 일할 사람 구하기도 힘들었다. 자식들도 커갔기 때문에 학비도 문제가 됐다. 서울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서울에는 첫 부인의 남동생이 작은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부인과 일을 했다. 7~8년 동안 두 사람의 월급을 모으고, 신전에서 올라오는 소작료를 저축하니 현금이 1억정도 모아졌다. 꽤 큰 돈이였다.

어느날 서울 생활이 힘들어졌다. 다시 신전으로 돌아왔다. 마침 무역회사에 다니던 외아들이 멕시코에 정착해 그곳에서 사업을 해 보겠다는 기별이 왔다.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있는 현금과 논을 판 돈을 합쳐서 모두 보냈다. 논은 노부부가 식량만 할 것만 남기고 팔았다. 그러나 해외에서 벌인 사업이 쉽게 성공할 리가 없었다. 아들은 고생 끝에 사업을 접고 말았다. 돈은 아깝지 않지만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어 그게 걱정이다.

일흔이 넘자 모아 둔 재산도 없고 남의집 농사를 지을수도 없었다. 열심히 벌었지만 그게 남는게 아니였다. 자식들이 이만큼 커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신전 복지회관에 다니며 서예를 배웠다. 붓글씨 배우고, 공모전에 응시하는 것도 보통 돈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였다. 할머니가 해남, 영암으로 날품을 팔러다니며 그 돈을 댔다.

송완종 어르신은 200여만원을 들여 제작한 도록에 ‘제가 서예공부를 시작하자 아내도 좋아하고 자식들도 지필묵을 준비해 주는등 온 식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더욱 열심히 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적었다.

지난 19일 오전 신전면 복지회관 2층. 강당에 40여점의 서예작품이 내 걸렸다. 송완종 어르신의 팔순 기념 전시회였다. 점심때는 노인회원들에게 점심이 제공됐다. 자녀들이 나와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작은 무대에서는 국악 공연단이 흥겨운 창이 울려퍼졌다.

송완종 어르신에게 서예를 하면서 가장 귀감으로 삼는 문구를 하나 추천해 달라고 부탁 했다. 손가락이 전시작품들을 가르키다 한 곳에 집중됐다. 이런 문구였다. ‘夫婦和樂其家興(부부화락기가흥)’ ‘부부가 화합하면 가정이 흥한다’
1935년 해남 옥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송완종 어르신은 그렇게 팔순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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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완종 어르신이 걸어온 길

□1935년 2월 27일 해남군 옥천면 화촌리에서 농사를 짓던 송기평 윤도순씨 사이의 3남2녀중 3째로 출생.

□1948년 (12세
) : 해방이 되면서 옥천초등학교 입학.  키가 크고 곱셈을 잘한다며 월반을 시켜줘서 4학년부터 다녔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3년간  다니고 졸업.

□1949년 (13세): 초등학교 졸업 후 남들은 검은 모자를 쓰고 중학교에 가는데  학비가 없어 농사일을      돕기 위해 지게를 들쳐메고 산으로 갔음.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 형님 행방불명. 
큰 형님이 해방 후 해남군청에 다니며 좌익머리를 쓴다고 수배령이 내리자 그때 돈으로 3천만원의 공금을 가지고 잠적.  체포돼 목포에서 형무소 생활. 얼마남지 않은 땅을 모두 팔아 형님 뒷바라지.

□1950년 (14세): 6.25 발발. 형님 행방불명.

□1952년(16세): 농사지을 땅이 없어 옥천정미소 취업. 그곳에서 대동20마력짜리 발통기 전문가가 됨.

□1959년(24세): 육군 입대. 대구헌병학교에 입교

□1960년(25세): 제대하기 전 첫 결혼

□1961년(26세): 군제대. 강진의 정미소에 발통기 담당자로 취직.

□1962년(27세): 첫 부인 분만중 사망. 아이도 사망. 강진의 정미소에서 일하며 첫 부인 사망소식 들음.

□1962년(29세): 해남 북평면, 좌일면등에서 방앗간 생활.

□1967년(32세): 부모님 모시고 강진 신전으로 이주. 신전의 부인과 재혼. 옥천의 논 일곱마지기를 팔았으나 빚을 갚다보니 두마지기 돈만 남음.신전 수양리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림. 송씨문중답을 벌며 생계유지.  신전의 오두막집에서 첫딸 순산

□1969년(34세):송씨 문중 제각으로 이사 제각에서 30년 생활. 논 20여마지기 경작. 문중산을 개간해서 뽕나무를 재배하며 누애를 키웠음. 일꾼도 한명두고 농사를 지을때로 이때가 가장 안정적인 생활이였음.  돈도 꾀 모음. 딸둘 아들 하나 낳음.

□1994년(59세): 농사를 도저히 지을 수 없어서 서울로 부부가 이사. 친척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서 7년 동안 일함. 1억정도의 현금을 모았음. 서울생활이 점점 어려워짐.   

□1999년(64세): 신전으로 다시 이사. 현재의 집을 직접 지음. 신전면 주작필경회 창립회원. 외아들이 멕시코에서 사업을 벌임.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논은 식량할 것만 남기고 팔고, 있는 현금과 합해서 몽땅 보내줌. 나중에 아들의 사업은 손해만 보고 끝났음.

□2003년(68세):한국문화예술협회로부터 예술대제전 초대작가 증서를 받음.

□2007년(72세):70세 넘어으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어 쉬면서 생활함. 부인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해남이나 영암으로 밭일을 다님. 자신은 노인일자리 창출사업등에 나가며 용돈을 벌어 서예비용에 보탬. 

□2011년(79세):그래도 지금까지 살았는데 뭔가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듬. 서예전시회 계획.

□2012년 1월 통일맞이 전통미술대전 특선 등 수 차례 수상.

□2012년 3월 (80세): 신전복지관2층서 서예개인전. 전시회하고 음식장만하는데 모두 1천만원 정도가 들어갔는데 딸들과 아들이 부담함. 그중에서도 아들이 가장 많이 냄. 멕시코에 사는 외아들이 빨리 결혼해서 손자를 보는게 가장 큰 소원. 

 ※송어르신은 호적이 3년 늦게 올라갔기 때문에 나이와 일부 기간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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