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명 의원
박 대통령 권유로 당직 맡아 '맹활약'
정보부 끌려가 고초격은 후 '민주주의 중요성 절감'

지난 1967년처럼 1971년에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같은 해에 치러졌다. 제7대 대통령선거는 4월27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는 한 달여 뒤인 5월25일 각각 실시됐다.

장기집권을 꾀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69년 10월, 6차 개헌을 통해 3선 연임을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71년 4월 대선에 출마, 김대중 후보를 95만여 표 차이로 힘겹게 누르고 3선에 성공했다.

모두 204명(지역구 153명, 전국구 51석)을 뽑는 8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은 113석(지역구 86석, 전국구 27석)을 차지해 원내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신민당은 7대 총선보다 두 배가 많은 89석(지역구 65석, 전국구 24석)을 얻어 예상외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밖에 국민당과 민중당은 각각 1석을 차지했다.

전남(광주 포함)의 선거구는 7대 국회보다 3개가 늘어나 22개 선거구가 됐다. 6대 국회(63년)에서 조정된 선거구수(19개)가 10여년 만에 재조정된 것.

22명을 뽑는 전남지역은 모두 68명이 출마해 3.1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는 7대 총선 당시 4.68대1보다 낮은 경쟁률. 전남에서는 8대 국회 임기동안 재·보선이 치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72년 10월 17일 “우리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는 요지의 특별선언을 발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등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정당 및 정치활동이 중지되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기능을 대행했다. 이 때문에 8대 국회는 임기 4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단명(1년3개월17일)으로 끝나는 비운을 겪었다. 8대 국회의 임기는 역대 국회 중 5대 국회(9개월 18일)에 이어 두 번째로 짧은 임기.

박정희 정권은 비상국무회의에서 제안한 7차 개헌안(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유신헌법의 주요내용은 ▲대통령 임기 6년 및 중임제한 철폐 ▲통일주체국민회의 설치 및 대통령 선출 ▲국회의원(유신정우회) 3분의 1 대통령이 지명 등 대통령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완전 장악하고 1인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란 명분을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했으나,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이 부정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게 됐다.

 

제8대 국회 개원협상을 위한 여야 총무회담 장면. 가운데 백두진 국회의장, 백의장 왼쪽에 장경순 부의장, 오른쪽에 정해영 부의장, 사진에서 맨 왼쪽이 윤재명 공화당 원내부총무(1971년)

강진 출신 후보 간 맞대결
유수현 후보 세 번째 낙선  
 


전남지역은 공화당과 신민당이 22개 전 선거구에 후보는 낸 것을 비롯해 국민당 14명, 통일사회당 4명, 민중당과 대중당이 각각 3명을 후보 공천했다. 당선자는 공화당이 15명, 신민당이 7명을 각각 당선시켰다. 선거에 참여했던 나머지 4개 정당은 한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전남 제13선거구(영암·강진)에서 총선에 출마한 후보는, 윤재명(尹在明·39, 공화당) · 유수현(劉守鉉·55,신민당) · 박종면(朴鍾勉·63,국민당)후보 등 모두 3명이었다. 윤재명 후보와 유수현 후보는 강진 출신이고, 박종면 후보는 영암 출신.

선거전은 윤재명 후보와 유수현 후보 간 양자 대결로 전개됐다. 지역 인지도와 이력 등 두 후보의 경쟁력은 영암출신 박종면 후보와 현격한 차이가 났다. 사실상 강진 출신 후보 간 맞대결로 선거전이 진행됐다. 
윤 후보와 유 후보는 지난 6대 총선 때부터 세 번째 맞붙었다. 6대 총선 때는 둘이 낙선하고 김준연 후보가 당선됐었고, 7대 총선 때는 윤 후보가 당선되고 유 후보는 차점으로 낙선했었다.  

윤 후보는 집권여당 후보라는 프리미엄과 함께, 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의정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성장가능성이 높은 정치신예로 평가받고 있었다. 유 후보는 5대~7대 총선, 6대 보선 등 4차례나 출마한 적이 있고 6대 보선(광주)에서 당선되는 등 선거경험이 풍부하고 인지도가 높았다.

선거 결과, 윤 후보의 재선 성공과 유 후보의 낙선으로 끝났다. 윤 후보는 총 유효투표수(8만9천926표)의 59.88%인 5만3천852표를 득표했고, 유 후보는 3만5천789표(39.80%)를 얻어 또다시 2위에 그쳤고, 전남농민회장을 역임한 박종면 후보는 고작 285표(0.32%)를 얻어 전남에서 최소득표자란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영암․강진선거구 제8대 총선 입후보자 명단>

이름

(나이)

기호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윤재명

(39)

1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7

국회의원

고려대 문과 졸, 재경전남학우회장,현대평론 사장, 민주공화당 전남도당 부위원장,민주공화당 전남 제12지구당위원장, 7대 의원

민 주

공화당

53,852

(59.88%)

유수현

(55)

2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1가 19

무직

일본 릿쿄(입교)대 경제학부 졸, 전남도 학무과장, 해남군수, 무안군수, 민정당전남12지구당 위원장, 민정당전남도당위원장, 6대 의원

신민당

35,789

(39.80%)

박종면

(63)

3

영암군 영암면 동무리 187

농업

독학, 전남농민회장,

대한농민회 최고위원

국민당

285

(0.32%)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조정의 명수 윤재명 의원
각종 여야 협상 깔끔 처리
지역구 관리도 잘해 


5·25 총선에서 유수현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 윤재명 의원은 국회와 당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공화당 원내부총무를 맡았다. 당초 국회직인 농수산위원장으로 내정됐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당부로 원내부총무를 맡게 됐다. 박 대통령은 총선 후 김재순 원내총무와 농수산위원장에 내정된 윤재명 의원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했다.

박 대통령은 “야당에 젊은 의원들이 많아서 윤 의원이 아니면 젊은 야당의원들과 접촉이나 대화가 어렵다고 김재순 총무가 말하더라. 농수산위원장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해도 된다”면서 부총무직을 권유했다.

윤 의원은 대통령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어 원내부총무(야당·언론담당)를 맡았다. 71년은 대선과 총선을 치렀고, 각종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여야관계가 불편할 때였다. 하지만, 윤 의원은 ‘조정의 명수’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부총무 역할을 잘 소화했다. 야당의원들은 “사교술과 인간관계에 있어 본능적으로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라고 평을 했고, 언론과의 관계도 좋았다.

윤 의원은 지역구인 영암·강진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도로 확장·포장사업과 저수지 축조공사 등 각종 지역발전에 필요한 예산은 적극 챙겼다. 67년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들이 농사피해 뿐 아니라 식수난을 겪자 한해대책조사반을 이끌고 영암·강진의 가뭄 현장을 방문, 조사보고서를 만들어 정부에 대책을 마련하도록 조치했다.

69년 9월에는 두 지역에 엄청난 수해가 발생했는데, 김종필 당의장과 함께 현장 곳곳을 방문하고 트럭 50대 분량의 구호물자를 강진과 영암에 배분하기도 했다.

앞서 7대 국회 때는 초선임에도 불구, 김대중 후보 자택 폭발물 사건 관련 국회조사특별위원장을 맡아 여야의 상반된 입장을 잘 조정했고, 전형적인 후진국형 참극이었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때도 국회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아 책임소재를 분명히 규정하기도 했다.

윤 의원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소사육과 증식을 장려하는 <농우대여장려법안>을 제출하기도 했고, 국회 대정부질문 때는 농약공급 및 신제품 개발을 촉진시킬 수 있도록 <농약공사> 설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윤재명 의원이 1969년 9월 강진군 도암면 수해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윤 의원은 트럭 50대 분량의 구호물자를 강진과 영암에 지원하고 수재민들을 격려했다.
집권여당에서 ‘잘 나가던’ 윤 의원도 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치성 내무장관 불신임안 가결사건인 ‘10·2 항명파동’ 이 바로 그 것. 1971년 10월 2일 신민당이 제기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이 일부 공화당 의원의 가세로 가결됨으로써 공화당의 숙당선풍으로 이어진 사건을 말한다.

당시 원내 부총무로 활약 중이던 윤 의원은, 오치성 장관 해임안이 가결된 다음날인 10월 3일 서울 명륜동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20여명의 동료의원들도 끌려갔다. 마침 이날은 추석날이었다.

중정요원은 다짜고짜 윤 의원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김성곤 의원한테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 반란 지령을 받았느냐”고 추궁했다. 옆방에서도 누군지 모르지만 얻어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 주눅이 들게 했다.

윤 의원은 얻어맞으면서도 “절대 돈을 받은 일도, 지령을 받은 일도 없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자, 다음날 새벽 3시께 발설하지 말라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윤 의원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럽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서 “집권여당에서 잘 나가던 나에게 대하는 것이 이 정도였는데, 서민과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니 아찔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3선 의원을 지낸 윤재명 의원의 10대 국회 때의 정치행적이나 일화 등은 <10대 국회>를 소개할 때 다룰 예정임. 이에 앞서 <7대 국회>때 윤재명 의원 성장과정과 청년시절 등을 소개한 바 있음. 강진일보 홈페이지 참조.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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