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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가가마터를 찾아라<3> 1964년 5월 대구서‘아! 청자가마터’이용희 청자장 집 앞마당서 청자기와 우수수 쏟아져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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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06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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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청자장 집 앞마당서 청자기와 우수수 쏟아져
최순우 실장 “이제야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했습니다”  

   
1964년 국립박물관 발굴도자팀이 대구 사당리에서 최초로 발굴한 청자가마터이다. 이곳에서 청자기와가 발굴됐다. 뒷쪽으로 보이는 초가집은 지금의 청자박물관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사진제공= 이용희 청자장>
6.25 직후 개성박물관에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피난 온 국보급 고려청자들은 1.4후퇴때 부산으로 다시 옮겨져 관재청 건물에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1951년 7월말의 일이다. 김재원관장이 최순우실장등을 관장실로 불렀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극비사항입니다. 부인들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내용은 그랬다. 며칠전 이승만 대통령이 고려청자를 포함한 국립박물관 주요 소장품을 미군 함정편으로 하와이 호놀루루미술관으로 옮기라는 극비 문건을 문교부 장관에서 발송했다는 것이었다. 전황이 불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공군이 더 많은 인해전술로 남하하면 부산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대통령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를 해외로 옮긴다는게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 극심한 혼란이 야기될 게 뻔한 일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서 문화재를 피신시키는 것으로 소문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산에 있는 수십만 피난민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면서 자칫 무정부상태가 될 수 있고, 적들에게 다시 대규모 공세를 펼칠 빌미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문화재 당국은 6.25 직전 개성에서 고려청자등을 미리 피신시켰을 때 개성주민들의 흉흉해진 민심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화재 하와이 피신을 극비리에 진행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재원관장은 학예사들에게 “이번 일은 단순한 유물 포장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군사작전이라고 생각하고 보안을 철저히 지킬 것”을 주문했다.

   
60년대 초반 사당리에서 청자발굴을 돕던 주민들이 활짝 웃고 있다. 제일 좌측이 이용희 청자장이다.
선조들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들이 다른 나라 군함에 실려 바다 건너 미국까지 피난가야 한다는 서글픈 현실에 다들 가슴이 먹먹해 졌다고 한다.<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152페이지 참조> 그해 8월 초부터 미국으로 피난 보내기 위해 430상자의 문화재가 포장을 마쳤다. 기나긴 노동이었다. 그러나 1952부터 휴전협정이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라 문화재 하와이 피난 계획은 백지화 됐다.

6.25 직후 미국으로 먼저 피난을 떠난 문화재도 있었다. 1950년 7월 25일 한국은행 금괴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 본점 금고에 보관시킬 때 경주분관에 있던 금관등 주요 유물 204점도 함께 떠나보내 전쟁이 끝난후 되가져 왔다.

전쟁이 끝났다. 문화재 정리작업도 잘 진행돼 국립박물관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1960년대 초반 정양모란 젊은이가 국립박물관에 무보수 촉탁직원으로 들어온다. 고유섭, 최순우, 정양모로 이어지는 고려청자 대가들의 맥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정양모는 63년 2월 3일 서울도봉산에서 조선초기 백자편을 무더기로 발굴해 유명세를 탔다.

둘은 청자가마터를 찾는데 의기투합했다. 1960년 최순우는 전북 부안군 유천리로 청자가마를 찾아 떠났다. 그곳에서 청자벼루를 한점 수습하고, 무수한 파편을 발견했으나 청자가마를 발견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다가 1964년이 왔다. 그해 5월 중순 최순우와 정양모가 서울을 출발해 이틀만에 강진군 대구면 수동에 도착했다.

두사람은 나침반을 가지고 마을 주변을 기웃거리다 간첩으로 오인돼 지서에 끌려가기도 한다.

그 와중에 한 할머니가 소쿠리를 들고 나타났다. 소쿠리에 꿈에도 그리던 청자기와 편이 하나가득 들어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가...’ 최순우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대신 정양모가 “그것을 어디서 주웠어요”하고 물었다. “저희집 마당에서 주운 것인데... 아들이 팔지 마라고 한 것이지만 돈이 하도 급해서...”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이다. 당시에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오직 청자가마터를 찾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을 때다.
이 할머니의 이름은 김월엽이였고, 그의 아들은 훗날 청자장이 된 이용희였다. 그의 집 사당리 117번지에 청자가마가 있었고 그 가마에서 청자기와가 만들어져 나왔던 것이다. 서울에서 즉각적으로 발굴조사단이 꾸려졌다. 한달여 동안 진행된 1차 발굴조사 결과 청자가마를 발견했고 이곳에서 수키와, 막새기와등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1차 발굴이 마무리된 후 많은 비가 내렸다. 최순우와 정양모가 대구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리던 비가 그쳤다. 최순우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최순우는 아득한 눈길로 노을에 묻힌 소나무숲을 바라보았다.

‘우현(고유섭)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했습니다’
25년전 개성박물관에서 보았던 청자기와편의 비밀을 푼 최순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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