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현물 통용... 현금은 2전, 요즘돈으로 3만원 정도

1865년 4월 2일 작천면 용상리 강재 박기현 선생의 집안에 초상이 났다. 지금으로부터 147년전의 일이다. 당시의 초상집 풍경은 어떠 했을까. 강재선생의 기록물 중에는 당시 부의록‘賻儀錄’이 여러권 전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 10년 동안 장례문화는 급변했다. 장례식은 장례식장에서 치르는게 일반적인 일이 됐다. 부의는 현금이 전부다. 그러나 부의는 상가집에 내는 돈이나 물품을 말하는 것으로 20여년 전만해도 쌀이나 보리같은 현물을 내는 문화가 있었다.

147년 전 부의록을 보면 대부분 현물을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례에 필요한 일체물품이 부의를 통해 이뤄졌다. 당시 부의록에 따르면 장례첫날 새우, 종이, 종이신, 술, 낙지 1속, 계란 13개, 초 5개, 닭 1마리, 민어 1마리, 오징어 1속이 들어왔다.

죽을 부의품으로 낸 것도 눈에 띈다. 장례 이튿날 죽 한 항아리가 들어왔고, 다섯명이 역시 죽을 가져왔다. 완도에서는 해산물이 가득 들어왔다. 건어, 전복, 홍합, 해삼이 들어왔는데 이를 소전복 10개, 큰 전복 3개로 분류하고 있다. 해삼은 20개가 들어왔다. 송판, 대나무, 담배, 녹두묵, 쌀, 채소 한묶음, 은어, 생밤, 대추, 붓도 들어 있다.

특이한 점은 상여를 메는 역군도 부의품으로 왔다는 것이다. 완도에서 상여짐꾼 1명과 심부름꾼 3명을 보냈고, 인근마을에서 역꾼 31명을 보내왔다고 역시 부의록에 기록하고 있다.

그럼 돈을 낸 사람들은 얼마나 냈을까. 돈을 낸 사람은 몇 안되지만 2전씩이 기록돼 있다. 2전이면 요즘 돈으로 약 3만원 정도에 해당된다. 요즘도 축․ 부의금은 3만~5만원 정도를 낸다. 147년전이나 지금이나 조의금 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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