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최후국가 침미다례는 어디였을까

서기 369년 어느날, 근초고왕의 백제군이 군동의 고해진 들녘에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백제군의 창끝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백제에 투항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마한의 마지막 부족국가 침미다례(枕彌多禮)가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제군은 파죽지세였다. 마침 신라쪽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 전라도쪽으로 넘어온 터라 병사들의 사기도 충천했다. 침미다례는 백제군의 기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는 마한의 멸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마한의 최후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없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에 그런 기록이 있으며 우리 역사학계가 그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한의 멸망과 전방후원분의 관계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강진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침미다례국의 위치부터 파악해 보자.

백제군이 군동의 고해진 들녘에 집결해 쳐들어간 침미다례는 어디에 있었을까. B.C. 300년경 출현했던 마한은 부족국가 형태였다. 여러 부족들이 웅거하며 작은 형태의 소독립국을 유지했다.

그 수가 54개에 달했다고 한다. 마한의 북쪽에는 백제가 있었다. 4세기들어 영토확장에 나선 백제는 마한의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369년에 마지막으로 ‘침미다례’를 무너뜨린 것이다.

침미다례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80년대 초반까지 침미다례는 제주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였다. 그러나 80년대들어 침미다례는 제주도가 아니라 강진의 어느지역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역사학자 천관우씨가 80년대 초 ‘침미다례는 도무(道武. 백제시대 강진의 이름) 혹은 탐진(耽津. 백제시대 옛 이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천씨는 침미다례의 구체적인 위치는 강진 대구일대였다고 기술했다. 침미다례가 강진일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강진 군동의 호계리, 나천리, 풍동리등에서 마한시대의 분묘형태인 옹관고분이 발견됐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문안식씨의 논문에는 침미다례가 신전 아래쪽인 해남 북일면 신월리 일대라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마한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고, 북일면 일대가 제주와 중국, 일본을 잇는 주요 해로라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천관우씨와 문안식씨의 주장은 침미다례가 강진만 주변이었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또 사학자 임영진씨는 침미다례가 고흥반도 일대라고 주장한다. 고흥반도에는 21개소에 달하는 고분이 존재하고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된 안동고분과 전형적인 남해안식 석실을 가지고 있는 동호덕 고분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침미다례는 고흥반도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침미다례의 위치에 대한 주장이 이처럼 다양하듯이, 마한이 완전히 멸명한 시기 또한 그 주장들이 많다. 두계 이병도 선생이 일본의 기록을 받아들여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방을 원정해 마한의 잔존세력을 소탕했다고 보았다.

이후 이 주장은 학계의 통설이 되었으나 369년 이후부터 백제가 전남지역을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침미다례가 멸망한 이후에 영암등지에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들어서는가 하면, 나주와 영암 시종면 일대에는 백제식 묘제와 다른 독자적인 묘제가 수백년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한 무덤에서 마한, 백제시대 유물이 층층히 발견되기도 했다. 마한의 역사가 수수께끼라는 것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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