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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건]1925년 9월 광주부녀자 폭행사건 ③부녀자 5명 재판 열리자 방청객 1천여명 운집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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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02  15: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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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뒤늦게 가해자들 기소 김강진 징역 1년6개월 구형
방청석에서 박수소리… 1920년대 사회정의 확인할 수 있는 사건

   
1926년 부녀자 폭행사건 재판이 열렸던 광주지방법원.당시에는 금남로에 있었으나 1967년 지금의 지산동으로 청사를 옮겼다.
검찰이 부잣집 부녀자들의 집단 폭행사건을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해 주범인 김강진만 기소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하자 사회적 공분이 확산됐다.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전면도배하다시피 3차례에 걸쳐 보도하면서 이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담당 변호사인 여윤빈 변호사가 장문의 항고장을 만들어 검사국에 제출했다. 항고장은 구구절절 했다. 본인들의 진술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5명의 부녀자들이 양안순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것이 확실하므로 모두 기소해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항고장의 핵심내용은 그랬다.

‘본 상해사건은 피해자인 양안순이 도립광주의원에서 입원중 세상에 보기드문 고열로 인해 체온기가 10여개나 파손됐지만 사망하지 않았다는 기괴한 사회적 풍평이 횡횡할 정도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이 사안은 한층 더 엄밀하게 조사해서 기소해야 할 사안이다’

당시는 지금의 광주고등검찰청과 같은 검찰 상급기관 항고기관은 대구복심법원이라고 해서  대구에 있었다. 항고장을 접수한 대구복심법원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항고장이 접수된 후 이틀후에 불기소 처분을 받은 가해자들을 모두 기소한 것이다. 그만큼 이 사건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

드디어 양안순의 폭행사건에 가담한 김강진을 포함한 5명의 부녀자들이 재판을 받게 됐다. 처음 열린 재판에서 김강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녀자들이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다. 동아일보는 ‘최종 결과가 엇더케나 될는지 이거시 기다려 볼만한 문뎨이다’고 압력성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특종보도한 동아일보 기자가 양안순을 찾아간다. 광주의 서남리라는 곳이였다. 이때의 양안순의 모습을 기술했는데 그 모습이 처참하다.

양안순은 잘 보지 못한 눈과 잘 쓰지 못하는 팔다리를 가지고 연방 기침을 해댔다. 그녀는 다행히 뽑혀 나가지 않은 ‘메추리 꼴랑지’ 같은 머리털를 매만지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기자에게 말했다.

‘이것보소. 내가 이렇게 지독하게 매를 맞었었소. 의사의 말씀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적이라하니 이 때문에 나는 오래살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죽어도 잊지 못할 그 원한을 풀지 못해서 아직 혼백이 붙어 있는듯 하오. 내가 이렇게 절통해서 그 절반이라도 보복을 하려고 고소를 했더니 경찰서에서 그것들을 잠깐 가두었다가 놓아주어 버려 그동안 증거인멸까지 했을 것이요. 그사람들이 재판에 붙여지고 증인들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돈많고 세력이 좋아서 증인들을 어떻게 위협할지 모르는 일이요. 나는 지금 죽지 않고 요행히 살아난다고 해도 병신을 면치 못할 신세이니 가해자들에게 죽을때까지 먹여 살리라는 위자료와 부양료 몇 만원을 민사소송을 제기할 작정이요.’

동아일보의 세차례에 걸친 특집기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고, 폭행죄로 기소된 4명에 대한 재판은 계속된다. 1926년 6월 30일 드디어 광주지방법원에서 검찰이 형을 구형하는 재판이 열렸다. 신문에 따르면 이때 광주지방법원에 이 사건의 재판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자그마치 1천여명에 달했다. 법정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법정밖에서 안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검찰은 이 사건을 ‘광주 모모 부호의 부녀 사오명이 작당해서 의지할 것 없는 불쌍한 여자를 임신중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난타해서 사경을 헤매게 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주범인 김강진에게는 징역 1년6개월, 나머지 부녀자들에게는 징역 8개월을 구형했다.

방청석에서는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동아일보는 후속 보도했다. 김강진을 비롯한 5명의 부녀자들이 최종적으로 얼마의 형을 선고받았는지는 뒷 기록이 없다. 그러나 1926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도 사회적 정의가 죽지 않고 살아 숨쉬고 있었으며 언론도 조그만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임에 분명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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