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 무명의 정치신인 윤재명
정치거물 유수현 김준연 무너뜨렸다

윤재명 의원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1967년에 치러졌다. 올해의 정치 일정과 비슷했다. 67년은 선 대선(5.3)-후 총선(6.8)이었지만, 올 해는 선 총선(4·11)-후 대선(12·19)으로 실시된다는 게 다른 점이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됐다. ‘6·8선거’라고도 한다.
선거 방식은 6대 국회 때와 마찬가지로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로 나눠 실시했고, 정당추천제를 채택해 무소속 출마를 완전 차단했다.

7대 총선은 공화당과 신민당, 대중당 등 모두 11개 정당이 참여했으나, 선거전은 공화당과 신민당의 양당 대결이었다. 선거 결과는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압승. 공화당은 모두 175석(지역구131석, 전국구 44석) 중 의원정수의 73.7%인 129석(지역구 102석, 전국구 27석)을 차지했다. 신민당은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대중당은 1석을 차지했고, 나머지 8개 정당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공화당은 3선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공화당의 7대 총선 압승은 3선 개헌(1969년,6차개헌)과 유신헌법 공포(1972년)로 이어져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더기 표, 대리투표, 노골적인 관권개입, ‘막걸리 선거’라는 오명을 남긴 매표행위 등 온갖 선거 부정으로 얼룩졌다. 실제로 선거사범이 엄청났다. 전국적으로 선거사범은 3천8백65건에 7천5백90명이나 됐다.

전남지역은 3곳(화순·곡성, 보성, 나주)에서 재·보선이 실시되기도 했다. 야당은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면서 등원을 거부하다 6개월여 만에 등원했고, 학생들도 야당과 공조체제를 이뤄 선거부정 규탄시위를 벌였다.

이에 앞서 7대 총선보다 1개월여 앞선 5월 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 윤보선 후보보다 116만여 표를 더 얻어 당선됐다. 

 
 여당 (윤재명) 대 야당(김준연, 유수현, 천수봉) 대결
 영암(김준연, 천수봉)과 강진(유수현, 윤재명)간 지역 접전 

전남지역은 7대 총선에서 모두 1백3명(재·보선 포함)이 출마, 4.68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는 6대 총선 때의 5.55대1보다는 낮은 경쟁률. 도내에서는 모두 11개 정당이 선거에 참여했고, 정당별로는 공화당과 신민당이 각각 22명을 공천, 가장 많은 후보를 출마시켰다.

강진은 이번에도 인접지역인 영암과 한 선거구가 되어 국회의원을 뽑았다.
전남 제12선거구인 <영암·강진선거구>에서 금배지에 도전한 후보는, 천수봉(千秀峰·53, 자유당) · 김준연(金俊淵·72, 민중당) · 유수현(劉守鉉·51, 신민당) · 윤재명(尹在明·35, 민주공화당)후보 등 모두 4명이었다.

이 가운데 유수현 후보와 윤재명 후보는 강진 출신이었고, 김준연 후보와 천수봉 후보는 영암 출신이었다. 

 <영암․강진선거구 제7대 총선 입후보자 명단>

이름

(나이)

기호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천수봉

(53)

2

영암군 영암면 회문리 191

농업

국문 및 한문 수학 15년, 황천양조(주) 취체역사장,대동산업(주) 사장, 영암금융조합장, 영암고아원 이사장, 초대 전남도의원,영암번영회장

자유당

6,142

(6.92%)

김준연

(72)

3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821

국회의원

동경 제국대 독법과 졸, 초대,3,4,5,6대국회의원,통일당 위원장, 자민당 총재, 민중당 총재

민중당

8,617

(9.70%)

유수현

(51)

6

강진군 강진읍 목리 356

국회의원

일본 릿쿄(입교)대 경제학부 졸, 전남도 학무과장, 해남군수, 무안군수, 민정당전남12지구당 위원장, 민정당전남도당위원장

신민당

26,894

(30.28%)

윤재명

(35)

7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7

실업

고려대 문과 졸, 재경전남학우회장,현대평론 사장,민주공화당 전남도당 부위원장,민주공화당 전남 제12지구당위원장

민 주

공화당

47,149

(53.09%)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선거전은 치열한 4파전으로 전개됐다. 천수봉 후보는 양조장 경영으로 재력을 쌓았고, 초대 도의원과 영암금융조합장, 영암번영회장 등을 지내면서 지역유지로 인지도가 높았다. 6선에 도전하는 현역의원인 김준연 후보는 5선 의원을 지냈고 자민당 총재, 민중당 총재, 대통령선거 출마 등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정치 거물.

역시 현역의원인 유수현 후보는 강진에서 5대, 6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바 있다. 그는 광주에서 65년 11월 실시된 6대 보선에 당선돼 금배지를 다는데 성공한 후, 이번에는 영암·강진선거구에서 재선에 도전한 것. 윤재명 후보는 6대 총선 때 첫 출마, 2위로 낙선해 득표력을 인정받았고 두 번째 총선에 도전했다.

언론에서는 ‘천년 아성’, ‘머리로 바윗돌을 깨는 격’이라는 표현들을 써가며 김준연 후보의 당선을 점쳤다. 선거운동은 여당 후보(윤재명) 대 야당 후보(김준연, 유수현, 천수봉) 대결, 영암(김준연, 천수봉)과 강진(유수현, 윤재명)간 지역 대결, 소지역(유수현-윤재명) 대결 등 얽히고설키면서 복잡하게 진행됐다.

선거전이 중반에 접어들자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를 방문해 지원사격을 했다. 야당이 ‘관권선거’라고 반발해도 지역선심 정책을 발표하거나 공화당 후보들을 불러서 ‘실탄’(선거자금)을 지급하는 등 ‘든든한 후방’ 역할을 했다. 윤재명 후보는 선거기간 중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고 목포를 방문한 이후락 비서실장으로 부터 당시는 거금인 7백만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이에 앞서 중앙선관위는 연초에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려, 대통령이 선거기간에 전국을 순회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선거운동의 길을 터줬다. 여당후보들은 1백 미터 달리기의 출발선을 이미  떠났지만, 야당후보들은 아직도 출발선에 서있는 셈이었다.

선거결과, 이변이 발생했다. 6선을 노리던 김준연 후보와 재선에 도전하는 유수현 후보 등 2명의 현역의원을 누르고 윤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무명의 정치 신인이 정치 거물을 무너뜨린 것이다.

윤 후보는 유효득표수(8만8천802표)의 53.09%인 4만7천149표를 득표했다. 2위는 역시 예상을 깨고 2만6천894표(30.28%)를 얻은 유수현 후보가 기록했다. 3위는 김준연 후보. 민중당 총재이기도 한 그는 유효득표수의 9.70%인 8천617표를 득표하는데 그쳐 체면을 구겼다. 4위는 6천142표(6.92%)를 얻은 천수봉 후보가 기록했다.


1971년 1월 27일 발생한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집 폭발물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윤재명 국후진상조사위원장이 김상현.김수한 의원 등과 함께 동교동 집을 방문해 조사하고 있다.

학상시절부터 지도자 자질
젊은시절 사업에도 성공

7대 총선에서 두 현역 의원을 누르고 첫 국회 입성에 성공한 인강(仁康) 윤재명 의원(1931.11.5~ )은, 다산초당 아랫마을인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337번지에서 9남매(6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도암초등학교를 거쳐 목포에서 문태중·고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상경,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고려대 문과대 국문학과에 들어가 58년에 졸업했다. 그 사이에 이현숙 여사와 결혼(1953년)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휴학, 제약회사를 경영해 제법 큰돈을 벌기도 했다. 

윤 의원은 학창시절부터 지도자 자질을 가졌다. 문태고 재학시에는 문태중·고 운영위원장(연대장)과 목포시내 중·고교 총 학도호국단장을 맡았다. 고려대 재학시에는 재경전남학우회장으로 선출돼, 당시 재경 전남 학우 1만여 명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윤재명 의원은 젊은 시절 사업에도 수완을 발휘했다. 장남이고 전쟁 통이라서 일찍 결혼한(24세) 그는, 대학을 휴학하고 쌀 두가마니를 배에 싣고 해창 부두에서 부산으로 갔다. 그러나 취업이나 돈벌이는 쉽지 않았다.

그 때 사실상 부도상태였던 제약회사(신선제약)의 사장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임대료가 없어 혼수이불을 주고 그 회사를 임대해 운영했다. 그 제약회사는 당시 전쟁이후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만연하던 성병 치료약을 만들어 팔았던 회사였다.

제약회사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상상할 수 없이 번창했다. 부산에서 상경해 종로5가에 제약회사를 차리고 본격적인 영업을 했다. 금고 대신 나무궤짝을 만들어 돈을 집어넣었는데, 밤이면 윤 의원 부부와 장모 등이 몇 시간씩 돈을 세어야 할 만큼 돈이 들어왔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하루 수입이 당시 집 한 채 값에 해당했다. 윤 의원은 큰돈을 벌자 대학에 복학했다. 그런데 그는 당시 학생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비싼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지프차를 타고 등·하교를 해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지프차는 유진오 고려대 총장이 타던 지프차보다 훨씬 고급차였다고 <고대교우회보>에 윤 의원 관련 글이 게재돼 있을 정도. 

윤재명 의원은 제6대 국회의원선거(1963.11.26)에 민주공화당후보로 공천을 받아 정치권에 입문했다. 윤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공화당 공천장을 받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종필 창당준비위원장(우측에서 두번째)과 정구영 당의장도 배석했다.
윤재명 의원은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이 창당될 때, 창당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정치 입문을 했다. 김용우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전 국방부장관)이 윤 의원을 창당 준비위원으로 천거하는 바람에,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 그해 8월11일 전남도당 결성대회를 했고, 그는 도당부위원장선거에서 같은 강진 출신이며 전남도의회 의장을 지낸 차운영씨(차종채씨 아들)를 제치고 부위원장에 당선돼 정치의 길을 순탄하게 시작했다.  

윤 의원은 6대 총선(1963년11월)때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모두 5번(6,7,8,10,12대) 출마해 3승(7,8,10대) 2패를 기록했다. 자녀는 2남(보현, 양현) 1녀(혜정). 장남(보현)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맏며느리는 전 KBS아나운서를 지낸 이병혜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올해 83세인 윤 의원은 역대 강진 출신 의원 중 최고령 생존 의원이다. 지금도 재경 강진 원로향우들과 골프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3선 의원을 지낸 윤재명 의원의 8대 국회와 10대 국회 때의 정치행적이나 일화 등은 해당 국회 때 소개할 예정임)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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