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순씨, 폭행당해 6개월된 아이 유산

‘마치 무덤에서 나온 듯한 처참한 광경’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양안순씨(가운데)의 모습이다. 폭행당한 후 1년이 넘었으나 머리를 동여메고 있다.
가해자 5명 모두 부자집 부녀자들
대서소는 고소장 안써주고
의사들도 진단서 발급 거부
변호사들은 사건 수임안해
검찰도 1명만 구속… 사회적 공분사

1926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다섯명의 여성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후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양안순의 모습은 처참했다. 하열까지 해서 온몸에 피가 낭자했고 전신이 부어올랐다. 또 머리카락이 전부 쥐어뜯기고 뽑혀서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보지 못할 끔찍한 광경이였다.

임신 6개월 째인 양안순은 당시 충격으로 유산을 했다. 두 눈은 피를 많이 흘려 실명위기에 놓여 있었다. 폐렴이 악화돼 반신불수가 되어 1년 여 동안 꼼짝을 못했다. 머리털을 너무 많이 뽑혀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 미친사람처럼 행동했다. 동아일보는 양안순의 모습이 피골이 상접해서 마치 무덤에서 기어 나온듯한 처참한 광경이였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더 심각하게 일어났다. 며칠 후 양안순이 이들을 고발하기 위해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으려고 했으나 의사들이 폭행한 여자들이 지역의 세력가이고 재산가인 것을 알게 되면서 진단서를 끊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대서소에서는 고소장을 써주지 않았다. 변호사들도 이 사건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양안순이 이웃집 다른 부녀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진단서를 끊었다. 진단서와 고소장을 써서 광주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이 사건을 경미하게 취급해 버렸다. 양안순을 폭행한 5명의 부녀자중 김강진 한명만 구속하고, 나머지는 조사 4일만에 훈방해 버렸다.

폭행사건을 주도한 김강진도 서류가 검찰로 넘겨진 당일에 석방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민들은 공분했다. 신문은 ‘조선여성으로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폭행사건을 이런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여론이 비등하다고 적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이유는 그랬다. 모두 양안순의 폭행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양안순의 임신사실을 몰라 아이가 유산되게하는데 고의성이 없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였다.

또 가해자 김강진과 양안순은 고향이 강진읍 서성리로 같아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였고 가해자들에 대한 소행조사에서도 다섯명이 모두 성질이 온순하고 남편에게 순종을 잘한 착한여자들이라는 것도 불기소 의견서에 포함돼 있다.

결국 검찰은 사건이 검찰로 넘어온지 7개월만인 1926년 5월 20일에 김강진만 상해죄로 기소하고 나머지 4명은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이를 전해 들은 양안순은 ‘그 통지를 받고 너무나 기가막혀 병세가 더욱 위독’해졌다. 검찰국에 ‘죄상이 명백한 사람들을 불기소 처분할 수가 있느냐’며 탄원서를 넣기도 했다.
 
이때 양안순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 광주의 어윤빈이라는 변호사였다. 어변호사는 검찰의 사건처리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해 6월 7일 장문의 항고장을 작성해 제출했다. 이때도 양안순은 자혜의원에서 육개월 동안 무료 치료를 받다가 그 병원에서 더 이상 무료치료가 어렵다고 하자 병원인근에 조그만 방한칸을 빌려놓고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였다.

동아일보는 항고이유서를 구체적으로 싣고 있는데, 그 내용이 굉장히 논리정연하다. 핵심은 김강진을 비롯한 5명의 폭행이 양안순이 낙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느냐하는 것이였다.

항소장에는 ‘김강진은 이미 폭행에 고의가 있었다는 것을 자백했고 피해자가 당시 회임상태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으로 고소인의 유산은 김강진의 불법한 폭행이 직접적인 원인이였다고 할수 있으며 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낙태시키려는 독립의사가 있어야하는 것이 아니다’며 김강진에 폭행죄는 물론 낙태죄까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가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김강진의 폭행을 용인하고 동조한 사람들이였으므로 피의자들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심도 흉흉해 졌다. 광주시내에서는 양안순이 광주도립병원에서 치료를 받던중 몸의 열이 하도 높아 체온계가 십여개나 파손됐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알 수 없는 소문이 확산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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