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과 여관, 요리집은 공정가격을 정해 일반에게 공표하라”

1959년 강진읍내 거리의 모습이다. 다른지역에 비해 일찍 시장경제가 발전했던 강진군은 주변지역에 비해 큰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물가대책 후속조치 
일제경찰이 대책회의 주관
‘이발료를 10~40%까지 할인하라’강권도

1922년 10월 강진군의 물가관리 방안이다. 1922년이라면 일제강점기 때의 일인데, 그때 강진의 물가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었을까. 당시 물가조정을 알 수 있는 기사가 동아일보 1922년 10월 30일자에서 발견돼 관심을 끈다.

신문에 따르면 당시 물가관리는 강진군청에서 군청급경찰서의 지휘로 이뤄졌다. 군청급경찰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급인지 알수 없으나 요즘과 달리 일제경찰이 물가조정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 10월 20일 군직원과 경찰서장급 군내유지, 잡화상인, 여관업자등이 어느장소에 모여 일종의 물가협정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일상 필요용품중 채소류와 육류, 젓갈류의 공급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고 권장하고 있다. 이를위해 군당국이 채소류재배와 양돈, 양계, 어획등을 장려해야 한다고 이들은 뜻을 함께 했다고 했다. 1920년대 초반이나 요즘이나 주민들의 주요 소비품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들은 또 ‘주민들의 필수품’인 잡화의 경우 해당 상인들과 협의한 결과 10~20%씩 인하하기로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군당국과 경찰의 강제조정이 이뤄졌던듯 싶다. 주민들의 생필품가격 인하를 통해 다른 물가의 안정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반가정에 대해서 극력 소비절약을 선전해서 이해시키자’고 결의했다. 소비절약이 미덕인 시대였다.

경찰서의 위력이 눈에 띠는 대목이 있다. 당시에는 경찰이 이발료와 인력차임, 우마차임, 여관 숙박, 식당등의 요금을 법규로 단속하고 있었다. 강진경찰은 이날 모임에서 이들 가격에 대해 10~40%까지 할인을 권장하는 강제적인 조치도 취했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곤욕스러운 조치가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공정가격을 공표하도록 지시하기도 한다. 대상은 주요 상점과 여관, 요리집, 의료기관이였는데, ‘공정가격을 정해서 이를 일반인들이 주지토록 공표할 것’을 결의했다.

저울을 잘 관리할 것은 지시하기도 한다. ‘도량형기의 법적 기준을 정확히 단속해서 곡류나 육류등의 계량을 정확히 할 것’을 참석자들이 결의했다. 저울은 요즘에도 강진군이 정기적으로 점검을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초반 물가가 급등하면서 갖가지 대책을 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가조절을 위한 전국 순회강연이 열렸고 1922년 9월 중순에는 조선총독부최고간부회의 국부장회의에서 물가조절책을 심의결정했다.

그 내용은 담배값과 철도운임을 인하하고, 소비절약을 선전한다는 것이 큰 줄기였다. 주요 항목에 냉장고의 보급을 확산시킨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 조선총독부의 발표가 기초가 되어 전국적으로 물가조절 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의 물가대책회의도 그런 형태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물가조절 대책은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를 듣는다. 동아일보 1922년 8월 20일자에는 조선총독부의 물가조절 발표내용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며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고 일갈하고 있다. 신문은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하나도 넣지 않음으로서 하등의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썼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