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담 스님 / 백련사

몇 해 전 응진당 마당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나무들이 겨울 찬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저마다 꽃망울을 품고 서 있는 모습을 겨우내 지켜봤다. 봄바람이 분다는 우수를 지나 때마침 내린 비에 슬며시 몸짓을 키우는 꽃망울들. 언제 꽃을 피울까?

기대하는 마음에 이른 봄 매서운 바람이 도리질을 한다. 꽃샘추위다. 이맘때면 늘 애가 탄다. 겨울 찬바람이 조그맣게 움 터서 맺혀 있는 꽃망울을 더욱 옹골지게 하고 그 매서운 추위가 매화의 향기를 더욱 짙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원묘국사가 생존했던 시절은 고려의 암흑기였다. 각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무신이 정권을 창탈했으며 급기야 몽고와 왜적의 침략으로 민초의 삶은 파탄에 이른다. 원묘국사를 모셨던 진정국사의 호산록을 보면 오랑캐의 잦은 수탈로 피난을 떠나 인적이 드문 남해의 암자로 몸을 옮긴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탁발을 나서 보아도 양식은커녕 끼니도 때우기 어려워 개경에 있는 상국(재상)에게 어렵게 구구절절 시주를 청한다. 암자 근처에 멀지 않은 산 아래에 있는 몇 이랑의 논이라도 시주해 주면 바랄 것이 없다는 참 슬픈 내용이다. 고려의 국사로 뭇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분도 전쟁의 참화는 피해 갈 수 없었다.

몽고의 침략은 무신의 난으로 혼란했던 고려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1231년 몽고가 침략하자 당시 최고 집권자였던 최우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몽고군은 1258년까지 6차례 전국을 유린한다.

백성들의 고통과 시름이 끊이지 않는데도 무신정권은 강화도의 방위에만 주력할 뿐 다른 지역이 침략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 창고를 짓는 등 사치스런 생활을 즐긴다.

이 시절 땅 끝 강진의 만덕산에서 원묘국사는 종윤스님으로 하여금 『임진년보현도량기시소』-임진년에 보현도량의 시작을 알리는 글-를 짓게 하고 백련결사를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과 함께 한 염불결사 운동의 시작이다.

백련결사를 할 당시 원묘국사의 세납은 70세였다. 당시 고려 귀족의 평균 수명이 40세도되지 않던 시절에 무엇이 노구의 승려로 하여금 결사운동을 하게 했을까? 유마경에 나오는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 말처럼 가슴 아파서였을까?

임진년보현도량기시소』에는 원묘국사의 절절한 바람이 나온다. ‘나라는 오래도록 창성하고 사해는 하나로 되며, 명산은 상서로운 기운을 드러내니 만세를 세 번 부르네. 문무백관들은 충성심으로 부지런히 보필하고, 백성은 풍년으로 기뻐하고, 천하가 편안하니 세상의 노인들이 전쟁을 보지 않고, 세간과 출세간이 똑같이 불제자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돌아가신 부모가 지혜에 접하여 욕망의 속박에서 몰록 벗어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고, 아울러 타향에서 겪는 고통을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참회와 염불수행으로 세상을 정토로 만들자는 운동은 120여 년간 8분의 국사를 배출한다. 고려 후기 시대정신으로 남은 백련결사를 태동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암울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몽고와 왜적의 침략과 무신의 정권욕, 귀족의 욕망과 그에 부응한 승려들의 타락이 낳은 욕망, 그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가슴속에 한 떨기 맑은 연꽃을 피우자는 결사운동으로 꽃피운 것이다. 시대가 어둡고 욕망이 강할수록 꽃향기는 더 진해진다. 마치 겨울을 이겨낸 매화꽃의 향기처럼…….

최자가 지은 『만덕산 백련사 원묘국사 비명』을 통해 다시 한번 국사의 향기를 가늠한다. [산 속에 자취를 감춘지 50년 동안 개경 땅에 발을 붙이지 않았다. 천성은 겉으로 꾸밈이 적었고, 순후하고 정직하여 눈으로 사특한 것을 보지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밤에는 등촉을 켜지 않았고 잠잘 때는 요가 없었다. 시주들이 바친 것은 거의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방장(方丈) 가운데는 세 가지 옷과 바릿대 하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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