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명 / 완도금일고등학교 교사

월남사터 맞은편에 있는 월남저수지를 지나 8번 지방도를 따라 약 2.5km쯤 작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남쪽을 향해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따뜻한 햇살바라기를 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마을 왼편에 세 그루의 늙은 당산나무(느티나무) 그늘 아래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작업 공간이나 휴식 공간으로 쓰이는 모정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 특이한 모양의 입석상이 하나 서있다.

지름이 대략 1.5m쯤 되는 둥근 대좌를 두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높이가 1.2m 가량 되는 돌기둥을 세워놓았다. 둥근 대좌는 세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데 8개의 돌출부를 가진 무늬를 새겨놓았는데 아마도 연꽃잎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돌기둥은 비석 형태를 띠고 있지만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울퉁불퉁한 자연석 그대로에 깨어지고 마모가 심하여 잘 구분하기 어렵지만 모두 13구의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비교적 돋을새김이 분명한 돌기둥 앞부분에는 머리에 뿔이 나고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눈을 무섭게 치켜 올린 모습이 영락없이 도깨비를 형상화한 듯한 입상이 2구가 새겨져 있다.

2구가 비슷하게 윗도리를 벗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오른손에는 방망이를 들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뜨리고 서있다. 드러난 배의 근육을 표현한 듯한 U자 무늬도 재미있다.

다른 면의 불상이거나 혹은 참선하는 수행자를 표현한 듯한 좌상이나 거의 얼굴 윤곽 정도만 남아 있는 보살상 등에서는 불교적 색채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좌에 연꽃잎으로 보여 지는 무늬가 새겨진 것도 그렇고 퇴동의 입석상은 민중들 사이에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전통 민간 신앙 가운데 도깨비 신앙이 불교와 습합된 사례로 해석된다고 한다.

퇴동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인 ‘사문(寺門)안골’은 이곳이 그저 월남사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옛 월남사의 규모와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이참에 월남사터 발굴 작업과 함께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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