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채 선생이 기증한 금릉읍지 필사본
금릉읍지(金陵邑誌)가 군에 기증되면서 금릉이란 이름이 새삼 관심을 받고 있다. 금릉이란 이름은 70년대 후반까지도 강진에서 자주 사용됐으나 어느 순간부터 슬그머니 각종 공식문서에서 사라졌다. 사회단체나 친목단체등이 금릉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정도다.

강진 사람들이 금릉이란 지명에 갖는 애착은 남다르다. 1907년 들어선 지금의 강진중앙초등학교는 사립금릉학교란 이름으로 출발했으며 1931년에 설립된 농업장려를 위해 설립된 조합이름이 금릉흥업조합이었다.

1947년 최초로 들어선 중학교의 이름은 금릉중학교였다. 금릉중학교는 1955년 3월 10일 금릉여자중학교로 바뀌었고 1962년 11에는 성요셉 금릉 여자 가정 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다양한 변천을 겪었지만 금릉이란 이름을 지켜온 셈이다. 1973년부터 금릉문화제가 시작됐다. 가장 큰 축제였다. 금릉문화제는 1996년 청자문화제가 열리기 까지 계속됐다.

금릉이란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편에 ‘도강현(道康縣)의 별호는 금릉이다’라고 소개되며 등장한다. 도강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그런데 금릉이란 지명은 중국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손권이 도읍을 정한 뒤부터 중국 강남(江南)의 중심지로 발전한 곳으로 대단히 번창한 의미로 통하는 명칭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강진이 그만큼 번성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단어다. 그래서 강진사람들은 금릉이란 지명을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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