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네 집안 후손… 김충식·차종채와 해방전후 큰 족적남겨

집안 형제들 상당수 일본유학, 귀국후 강진경제 이끌어
비장아들 김방식씨 강진읍 남포~해창 간척사업 주도
영랑 김윤식 선생도 같은 집안 출신
6.25때 비장후손 현영씨 집에서 칩거하다 사망

1957년 강진읍내 모습이다. 강진에는 기업가들이 많아 전남에서 광주시 다음으로 포장도로가 생겼고, 전기와 전화 또한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다.<강진명감 명승고적 사진집 참조>
김안식선생과 김충식선생, 차종채선생등은 서로 엇갈린 삶을 살았지만 강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세사람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안식선생은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였고, 김충식선생과 차종채선생는 ‘한문수학’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세 사람에게는 그런일이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김안식선생은 체격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훤칠했다. 김충식선생과 차종채선생의 기개 강한 일화는 많이 소개됐지만 김안식 선생의 일화는 알려진게 많지 않다. 한가지만 소개한다면, 일제강점기 시절, 보은산 고성사 기슭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 한번은 김안식선생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몽둥이를 들고 고성사 근처에서 밤을 샌적이 있었다. 물론 호랑이는 잡지 못했다. 그후부터 강진에는 ‘김안식도 차종채 만큼 기개가 쌔다’는 말이 생겨났다. 

김안식 선생은 비장네로 유명한 김경희 선생 집안의 후손이다. 김경희 선생은 1890년대 중반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비장(裨將)으로 활동했다. 비장은 지금의 도지사 비서실장 격이다. 김경희선생은 삼형제가 있었는데 삼형제가 강진에 함께 살면서 우애가 매우 깊었다고 한다. 김안식은 비장 동생의 아들이였다. 그러니까 비장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김안식선생이 일본유학을 간 것도 그렇지만 귀국해 강진에서 다양한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조상때부터 내려 온 재산이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장네 집안에서는 광식과 형식, 안식등 3명이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보통 재력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영랑 김윤식 선생도 이들과 유학생활을 같이 했는데 이들의 조카뻘되는 촌수였다. 광식과 안식은 비장의 동생 아들들이였고, 형식은 비장의 친아들, 그러니까 방식씨의 친동생이였다.   

이중에서 비장의 아들 방식씨의 친동생이였던 형식은 영어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해방후 미국극동사령부에서 동양인을 상대로 중령급 직원을 한명 채용한적이 있었다. 일본의 NHK편집장등 아시아 각국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쟁쟁한 사람들이 이 시험에 응시를 했다. 강진출신 김형식씨가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형식씨의 아들 현영씨는 영랑 김윤식 선생과 인연이 깊었다. 전쟁당시 영랑은 서울 약수동의 현영씨 집에 칩거해 있었다. 9.28 서울수복이 왔다. 두 사람은 거리에 구경을 나가는 참이였다. 그때 폭격기가 인근 기와집을 폭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영랑바로 옆에 있던 현영씨도 피가 낭자했다. 그러나 영랑은 작은 파편하나가 배에 박힌것 뿐이였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전전했다. 전쟁통에 좋은 약이 있을 수 없었다. 영랑의 부상은 복막염으로 악화됐다. 영랑은 결국 며칠 후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다시 비장네 가계로 가보자. 비장은 형제와 자녀들을 되도록 강진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아들 방식씨도 고향에서 같이 살았고, 손자인 소죽 김현장 선생도 역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강진에서 살게 했다.  

비장의 아들 방식씨는 사업수완이 좋았다. 강진읍 기룡마을앞 간척지를 방식씨가 주도해서 만들었고, 강진읍에 단독주택단지를 만들어 분양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45세에 아깝게 요절하면서 집안도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김안식 선생의 후손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안식 선생은 슬하에 현정, 문현, 고명, 영명씨등 4형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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