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읍 연동마을의 정 북쪽,천관산을 사이에두고 두 왕비의 역사 존재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 있는 공예태후 기념비

지난호에 장흥군 대덕읍 연동마을에 백제의 태자와 혼약을 하고 왕비로 책봉된 후 태자가 죽자 평생 수절한 ‘허연지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한 김에 한 사람 더 소개해야 할 사람이 있다.

공예태후(1109~ 1183)다.
공예태후가 태어는 곳은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이다.

천관산을 중심으로 대덕읍 연동마을은 천관산의 남쪽이고 당동마을은 산의 북쪽이다. 천관산을 두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왕비의 역사가 있는 것은 상당히 특이하다. 해질녁에 관산읍의 북쪽지역에서 당동마을쪽을 바라보면 신비함과 웅장함이 유별나다.

천관산을 배경으로 삼아 영락없이 코끼리를 닯은 야산이 버티고 있는 모습은 신비스럽기 까지 하다. 그 안쪽에 당동마을이 있다.

공예태후는 이곳에서 임원후(任元厚)의 딸로 태어났다. 공예태후가 왕비가 되는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탐진최씨의 시조인 최사전(1067~1139)이란 사람을 알아야 한다.

최사전은 고려시대 인종의 어의(御醫)였다. 인종이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외조부였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다. 유명한 '이자겸의 난'이다. 당시 이자겸의 난을 결정적으로 제압하도록 도운 사람이 최사전이었다.

인종 임금은 이자겸을 영광군으로 귀양 보내고 최사전에게는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문화사랑 평장사라는 최고의 벼슬을 주었다. 1126(인종4)에 이자겸이 물러나자 이자겸의 딸이자 인종의 어머니는 폐비가 되었다.

그 후를 이은 사람이 당시 장흥 관산읍 출신의 임씨였다. 그녀는 공예태후가 되었다. 공예태후는 1127년 의종(毅宗)을 낳는등 5남 4녀를 낳았는데 이중에서 의종, 명종, 신종등 세명이 왕위에 올랐다. 공예태후를 추천한 사람이 바로 최사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예태후는 1184년 7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1170년부터 시작된 최씨 무신정권을 견제하며 왕권을 지켜 낸 고려왕조의 큰 할머니 예우를 받고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인종이 관산출신의 왕비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인종은 왕비를 위하며 '수시로 은전을 베풀고' 장흥에 사는 왕비의 친정어머니가 죽자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영암에 소속되었던 장흥이 장흥이란 이름을 얻고 지사부로 승격된 것도 바로 인종2년 (1124년)때 였다.
왕실과 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의 관계가 다른 지역과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공예태후의 고향인 관산읍 당동마을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강진군 대구면 청자촌이다.

청자촌과 가까운 관산에서 탐진사람 최사전의 추천으로 왕비가 나온 것과 함께 그 이후 공예태후가 낳은 아들들이 세명이나 왕위에 오르는 기간 동안 강진청자가 가장 번성한 점등은 고려청자가 고려왕실과 너무나 깊은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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