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제주도 사람… 강진군수 오랫동안 맡아

‘친일반민족행위 관료’친일진상규명위 등재
  양아들 채순병은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받아

채순병
강진의 1호 도의원에 뽑힌 채수강은 연대적으로 볼 때 한일병합 직전부터 강진군수를 맡다가 그 후에도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일제에 대단한 충성을 보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2009년 11월 발행한 보고서에는 조선인 관료 부분에 채수강의 이름이 등재돼 있다.

그는 강진군수를 마친 후 함평군수와 영광군수를 역임하는등 일제치하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다가 1920년 초에 퇴임한다. 아마도 영광군수를 퇴임하자마자 강진의 도평의원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극명히 대비되는 기록으로 그의 양아들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양아들 채순병<사진>은 제주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채순병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제주출신인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인 1919년 3월 4일 밤 하숙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개최되니 태극기를 가지고 나오라’는 격문 400여매를 만들어 배포하고 다음날 남대문역 앞에서 시위행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나온다.

기록중에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가 1920년 5월 14일 가출옥해서 전남 강진에 사는 양아버지 채수강의 집에서 휴양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채수강이 도평의원 임명과 함께 거처를 강진으로 옮겼고 그의 양아들 채순병이 이곳 강진에서 휴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일 관료의 길로 잔뼈가 굵었던 채수강과 반일의 최전선을 걸었던 그의 양아들이 강진에서 지내며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사뭇 궁금하다. 채순병은 강진에서 2년을 보내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곧바로 요절하고 말았다.

채순병은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채수강은 그후로 19년만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보고서에 이름을 올렸다. 역사는 두 사람을 분명히 다르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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